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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기어를 거꾸로 넣고 달린다 사랑과 삶 되감기 1

1세대 무쏘 스포츠- 기억의 연료에 서서히 불을 붙이다.

by stephanette

기억은 기어를 거꾸로 넣고 달린다

- 후진의 감각으로 바라본 사랑과 삶 1편


30년 전인가

어느 저녁에 일어났던 일이다.


좌석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옆좌석

그러니까 복도 쪽에 어떤 남자가 앉았다.

그에게선 어떤 에너지도 감지되지 않는다.

안심이다.

그때에도 직감은 예민했었다.


집 근처 정류장에서 내리는데

그 남자도 내린다.


버스에서 내린 나에게

뜬금없이 연락처를 물어본다.

평소 같으면

대꾸도 없이 외면했겠지만,

바리톤의 저음이 마음을 울린다.

얼굴을 들어보니,

둥글둥글한 웃는 낯이다.


삐삐 번호를 알려줬다.

하얀색의 모토로라

당시 나의 삐삐는 거의 공용이라

매일 바꾸는 오프닝 멘트를 듣고자

나도 모르는 이들이 확인을 했었다고 한다.


삐삐가 있던 시절엔

오프닝 멘트를 넣을 수 있었다.

30초인가 제한이 있는 그 짧은 시간을

매일 새로운 녹음을 했었다.


시끌벅적한 농구장에서

"이 열기가 느껴지시죠!!!" 뭐 그런 놀이였다.

가끔 댓글처럼 음성 녹음이 남겨져 있기도 했다.

혹은, 짧은 소설을 이어서 매일 남기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의 삐삐를 듣기도 한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재미났던 놀이다.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모르는 이는 만나지 않는다.

낯선 이와 말을 하지 않는다.

모르는 장소에는 가지 않는다.

난, 남자의 낮고 울리는 목소리에 유독 약한가 보다.


수원 북문에서 만났다.

내가 기도를 하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나는

어딜 가든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고 기도했다.

알고 보니,

내가 다니던 근처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다.

성악가의 목소리 같은 그런 음성이 더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알고 보니 성악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모르는 이와

수십 년을 알고 지낸 것처럼

익숙하게

수원 북문에서 만나

일식 우동집을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달짝지근한 채소육수를 끓이는 습기가 훅 하고 밀려든다.

작은 나무 국자에 일식 주물 그릇에 담긴 우동이

촉촉하게 마음을 적신다.

부들부들한 배추와

두꺼운 사누끼식 우동면

뜨끈한 국물


일 년에 한 두번인가

수원에 우동을 먹으러 갔다.

딱히 거창한 이야기도 아니다.

우동을 먹고

근처 골목길에 있는 커피점을 간다.


이태리 앤틱 가구들과 하얀 광목의 커버가 씌여진 푹신한 소파들이 주연인

그런 가게이다.

사람도 별로 없는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가구들을 구경한다.

하릴없이 만나서 노닥노닥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진다.


어째서인지,

일본식 우동집도

앤틱 가구 카페도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끔은 그가 그의 차를 끌고 데리러 왔다.

그렇다고 가는 곳이 달라지진 않는다.

조용히

우동을 먹고,

앤틱 가구를 구경하고.


조용하고

햇살 비치는 곳에서

잔디밭을 구경하는 기분.


초록색 무쏘 스포츠를 떠올리면,

그 모든 기억이 떠오른다.



사족

1세대 무쏘스포츠 픽업트럭

쌍용자동차에서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생산한 뉴무쏘 기반의 중형 픽업트럭이다.

무쏘보다 남성미가 철철 넘치는 아이였다.

무려 픽업트럭이라니.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모델이었다.

그래서 상당히 바라보기만 해도 애정이 절로 흘려 넘쳤던 아이이다.


P100, 2002. 9. 5~2006. 4

배기량: 2,874cc

최고출력: 120PS/4,000 rpm

최대토크: 25.5 kgf·m/2,400 r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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