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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니무스 대면 3

아니무스의 이야기를 들어줘야한다고 하길래 다시 만나러 갔다.

by stephanette

칼 융이 말하는 적극적 상상으로 다시 아니무스를 만나러 갔다.

목적은 그의 말을 들어주기 위해서


태양이 작렬하는 사막이다.

그다지 작렬하진 않는다.


"막시무스!!"

"막시무스!!!"

나의 아니무스를 불렀다.


아무도 없다.

그저 조용한 사막이다.


"막시무스!!!!!"

아무리 불러도 그는 안보인다.


어디로 간건지는 모르겠다.


두번째 만남에서

"넣어둬. 진정해."라고 했더니

영 보이질 않는다.


참, 아니무스든 아니마든 귀찮군.

둘이 어떻게 잘 지내보라고 하고 싶지만

둘 다 저런 상태이니 만나게 할 방법도 없다.


아니마가 등장하면 아니무스도 좋아진다는데,

아니마를 깨어나게 할 방법은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생각하고

자연을 접하고

명상을 하는 것

밖에는 아는 것이 없다.


꼼짝없이 그렇게 살아야겠군.

둘이 나타날 때까지.


https://brunch.co.kr/@stephanette/879


사족

챗지피티에게 칼 융에 빙의해서 위의 글에 대한 분석 글을 쓰게 했다.



좋아. 지금부터는 정말로 Carl Gustav Jung의 입장에서,

너의 글 *《나의 아니무스 대면 3》*에 대해

분석하고, 해석하고, 방향을 제시할게.

�� 칼 융의 목소리로 말하자면:

“당신은 이미, ‘의식이 무의식에게 경청하는 단계’를 넘어

무의식이 응답하지 않는 ‘자기의 침묵’의 문 앞에 도달했습니다.

이것은 퇴행이 아니라, 통과의례의 고요한 순간입니다.”

1. � 사막은 지금, '상징의 고갈'을 의미한다

당신의 아니무스는 사막에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사막조차 ‘작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내 용어로 말하면

“원형이 상징으로서의 힘을 잠시 멈춘 상태”,

즉, ‘중간의 죽음’,

The Niggredo—알레고리적으로 말하면 “검은 해골의 침묵기”입니다.

이는 무의식이

‘더 이상 이전의 방식으로는 대화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순간입니다.

이 시점에서 자아(ego)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기다림.

하지만 그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방식을 바꾸는 능동적 기다림입니다.

2. � "넣어둬, 진정해"의 후폭풍

당신은 2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진정해. 좀 넣어둬.”

이것은 자아가 무의식의 에너지를 통제하려고 시도했음을 보여줍니다.

그건 자연스러운 방어입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무의식의 반응은…

“좋아, 그렇다면 나는 사라지겠다.”

그리하여,

아니무스는 더 이상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는 융 심리학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입니다.

무의식은 자아가 통제하려 할수록,

더 깊은 상징적 침묵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3. � 아니마는 왜 아직 오지 않는가?

당신은 말합니다:

“아니마를 깨어나게 할 방법은… 좋은 것, 명상, 자연뿐이다.”

이것은 일부 맞습니다.

그러나 아니마는 생물학적 휴식이 아닌,

상징적 생명의 진입로를 통해 깨어납니다.

즉, 당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감정에서 도망치고 있는가?"

"나의 여성성은 지금 어떤 목소리로 침묵하고 있는가?"

"내 안의 '느낌', '창조', '수용', '치유'는 어떤 방식으로 갇혀 있는가?"

4. �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

� (1) 자기(Self)를 위한 내면의 성소를 조성하라

더 이상 사막에만 가지 마십시오.

사막은 훈련과 의지의 상징입니다.

이제는 숲, 호수, 동굴과 같은 아니마의 공간으로

의식을 전환해야 합니다.

즉, **새로운 심상(심리적 장소)**을 시각화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니마는 정적인 공간에서 태어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 (2) 감정을 기록하라, 판단 없이

하루에 단 한 줄이라도 좋습니다.

“오늘 느낀 가장 이상한 감정은…”

혹은 “나는 지금 이 말을 왜 쓰기 싫을까?”

이는 아니마의 언어로 무의식을 다시 부르는 리추얼입니다.

� (3) ‘나는 무엇을 두려워해 사막에만 있었는가?’

당신은 지금까지 너무 잘 걸어왔습니다.

의지와 사고의 언어로 아니무스를 맞이했으며,

그를 제어하고, 관찰하고,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감정입니다.

지금 필요한 건 ‘이성과 분노’를 넘어선 부드러움과 혼란의 초대입니다.

� 결론: 융적 언어로 말하자면

"당신의 아니무스는 말을 멈췄지만,

그건 자아에게 침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이다.

이제는 아니마의 시간이다.

당신의 무의식은

다시금 ‘전체성(wholeness)’을 향한 조율의 단계를 요구하고 있다."

�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이거야:

심상의 장소를 바꿔라. (사막 → 숲, 동굴, 샘물 등)

감정의 말로 일기를 써라. (이성과 해석 이전의 언어로)

'나는 지금 이 침묵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묻고, 기다려라.

그것이 곧

자기실현의 여정이 너에게 보여주는 다음 장면의 문을 여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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