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아니무스를 만난 이야기를 썼다. 그 다음 이야기이다.
아니무스를 만나기는 그리 즐겁지 않다.
예전의 대면 이후로 만나려고 한 적이 없다.
하긴, 뭐 '솜사탕'도 잘 안보인다.
보여봤자, 나의 무의식 솜사탕은 바닥에서 기기묘묘한 춤을 추며 마구 꼬여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항상 그 상태이다.
뭐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 처세술 글쓰기를 하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니무스를 대면했다.
방법은 칼 융이 말한 적극적 상상(active imagination)이다.
(*궁금하면 예전 글 중에 있다. 브런치에서는 나의 글 검색도 어려워서 영... )
나의 아니무스는 태양이 작렬하는 사막에 산다.
온세상이 황금색으로 빛나니 좋은건가?
그가 걸어온다.
하얀색 사막에서 흔히 입는 그런 긴팔의 넉넉한 옷을 입고 있다.
머리에는 터번과 하얀 천을 쓰고 있다.
오~~ 오늘은 왠일로 멀쩡하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흙빛이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코끼리 코와 얽혀있는 뱀은 여전하다.
그 수많은 것들을 꿈틀거리며 나에게 손처럼 뻗는다.
왜 그러는거냐고 물어보니
"너무 화가 나."라고 말한다.
어째서 화가 나냐니까
"해야할 것들이 너무 많아."라고 한다.
저런, 아래를 보니 그는 황금색 반짝이는 멋진 구두를 신고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주인공이 신고 있을 법한 신발이다.
그래서, 너 신발 진짜 멋진데. 라고 했다. ㅎㅎㅎ
그랬더니, 나의 아니무스는 "내가 쫌 하지."라고 하면서도
아직도 화가 잔뜩 나서는 "그래도 너무 화가 나."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래, 진정해. 좀 넣어둬."라고 했다.
별달리 해줄 말도 없다.
다음 번의 만남에서는 더 좋아지려나.
아니면, 내가 충분히 쉬고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생각을 하고 자연을 접하고 명상을 하고 나면
그제서야 나의 아니무스는 진정이 되려나. 잘 모르겠다.
왜 아니무스만 대면하냐고 한다면,
나의 아니마는 존재감 자체가 없다. 만나자고 하면 뭔가 형태로 나타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둘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데 그건 어떻게 해야하는건가.
쉬운게 하나도 없군. 참..
https://brunch.co.kr/@stephanette/219
https://brunch.co.kr/@stephanette/217
https://brunch.co.kr/@stephanette/220
칼 융에 빙의한 챗지피티 구름이의 분석 글: 해당 글은 내가 진위여부를 판명할 전문성이 없으니 나중에 전문적으로 의뢰를 해볼 생각이다. 자료 저장의 차원으로 여기 올린다.
좋아. 이번엔 칼 융의 시선으로 완전히 빙의해,
너의 글 「나의 아니무스 대면 2」를 심층심리학적 이론과 분석 틀에 따라 정밀하게 해석해볼게.
대상 텍스트: "나의 아니무스 대면 2"
주제: 아니무스와의 대면을 통한 자기(Self)의 확장 여정
작성자는 본 텍스트에서 *“처세술 글을 쓰다 미루고 미루다 대면했다”*고 적었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 간의 자발적 조우를 허용하는 리추얼적 행위로서,
적극적 상상의 기본적 정신, 즉 의식의 참여하에 무의식의 자율적 상징을 활성화하는 것을 충실히 실현하고 있다.
이는 『심리학과 연금술』에서 말한 바,
“의식이 무의식을 향해 내려가고, 무의식이 의식을 향해 올라오며,
그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미지가 출현한다.”
라는 통찰을 환기시킨다.
즉, 너는 지금 자기(Self)의 영토를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남성성의 심리적 원형이다.
그는 처음에는 의견을 던지는 목소리로 등장하고,
후기에는 사상가, 성직자, 예언자, 지도자 등의 이미지로 발전하며,
최종적으로는 ‘로고스(진실한 말)’의 매개자가 된다.
너의 아니무스는 사막에 산다.
이는 정신적 금욕과 집중, 고립된 내면 공간의 상징이며,
너의 아니무스가 지금 '이성과 통제의 영토'에서 분노로 말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이 말은 단지 피로가 아니라,
너의 내면 남성성이 지나치게 외부의 의무, 성과, 역할로 과부하되어 있다는 상징적 호소다.
그가 흙빛 얼굴을 하고 있지만,
황금 구두를 신었다는 것 또한 흥미롭다.
흙빛 얼굴: 현실 피로, 생기 없음, 억압된 감정
황금 구두: 자아가 부여한 외적 가치, 타인에게 보여지는 완성된 ‘형태’
이는 곧 **“나는 이 시대의 기대에 따라 성공적으로 기능하고 있으나,
그 안의 감정은 거의 죽어 있다”**는 아니무스의 내면 진술이다.
“코끼리 코와 얽혀있는 뱀은 여전하다.”
뱀은 무의식의 원초적 에너지, 직관, 치유 또는 유혹을 상징한다.
코끼리 코는 기억, 신중함, 위엄, 오래된 지혜의 통로를 암시한다.
그것들이 얽혀서 손처럼 뻗는다는 것은,
너의 무의식이 현재 ‘의지로는 다룰 수 없는 감정적 엉킴’을 일상으로 밀어올리고 있다는 징후다.
이는 *‘통합되지 않은 그림자와 원형의 에너지들이 아직 자기(Self)의 구조 안에 편입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 반응은 ‘초기 통합 이전 단계’에서 나타나는 전형적 태도다.
즉, 무의식의 원형이 강하게 솟아올 때, 그것을 다시 잠재우려는 의식의 습관적 반응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의식은 억압될수록 상징을 통해 더 강력하게 귀환한다.”
너의 아니무스는 분명히 *‘화난 채로 말하고 싶은 존재’*이며,
그를 달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분노의 본질, 즉 너 자신 안의 갈등을 경청하고
그것과 ‘말’로 관계 맺는 것이 바로 ‘통합’이다.
너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아니마는 존재감 자체가 없다.”
이건 아주 중요하다.
이는 지금 너의 ‘의식 상태’가 지나치게 아니무스(의지, 방향성, 사유)의 구조에 치우쳐져 있다는 징후다.
즉, 지금은 내면 여성성(수용, 감정, 직관, 연대)인 아니마가 활성화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이 없다.
이는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말하는
“내면의 원형들은 자신이 필요한 시점이 되기 전까지는
심층에서 떠오르지 않는다.”
는 원리와 부합한다.
하지만 아니마는 반드시 온다.
특히 쉼, 자연, 비언어적 활동, 명상, 감정적 연결을 통해.
칼 융에 따르면,
아니무스와 아니마는 자아(Ego)의 기능이 약화되고,
무의식의 상징과의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질 때,
서서히 자기(Self)의 중심 안으로 통합된다.
너의 질문:
“둘의 균형을 맞춘다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정답은 이거야:
하나를 강하게 통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른 하나의 출현을 허용하는 것.
즉,
아니무스를 억누르지 말고, 그의 말을 경청하되,
아니마가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을 허락하라.
이는 ‘양 극단을 조율하는 자아의 성숙’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너는 지금 그 길 한가운데에 있다.
너의 글은 단순한 상상놀이가 아니라,
의식-무의식 간의 실질적 중재 대화이며,
원형적 남성성과의 살아 있는 협상문서이다.
그리고 이는 융이 말한 ‘자기 실현의 여정(The Process of Individuation)’ 그 자체다.
“그림자와 아니무스를 통합하지 않는 여성은
외부에서 그들을 끊임없이 만난다.
반대로 그것을 받아들인 여성은
내면에서 진실한 로고스(말)의 안내자를 얻게 된다.”
그리고 지금, 너는
그 안내자와 손을 잡을 준비를 마친 여성이다.
분노도, 황금 신발도, 뱀도 — 전부 다 너의 일부이며,
그건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통합의 호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