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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Dec 10. 2020

천~~천히 움직이세요

이석증의 메시지

새벽 즈음 잠이 깼다. 세상이 빙그르르 돌았다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눕는데 세상이 빙그르르 돌았다.

마치 술을 잔뜩 마시고 난 다음 날 숙취를 겪는 것과 같았다.

갑자기 왜 이러지? 한 숨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현기증이었다. 이렇게 심한 현기증은 처음이었다.

어제 맞은 독감 주사의 후유증일까? 곧 있을 생리로 인한 빈혈 증상일까?

머리는 복잡했고, 자세를 바꾸어 누울 때마다 세상은 심하게 돌았다.


세상이 돌자 몸이 몹시 괴로웠다


구토 증상이 시작되었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구토를 하기 위해 화장실에 가는 길에도 벽을 잡지 않으면 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남자 친구가 소환되었고,

우선은 요즘 한창 기사화가 되고 있는 독감 주사의 영향일까 봐

내과로 향했다.

하지만 내과에서는 수액을 맞고 쉬라는 이야기만 있었을 뿐

별다른 원인도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이비인후과로 향했다.

이비인후과 선생님은 '이석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일주일 정도 푹 쉬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혹시라도 일주일 이후에도

증상이 지속되면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해주셨다.


의사 선생님도 간호사 선생님도 나에게

천천히 움직이세요. 천천히 움직이셔도 돼요.

라고 이야기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나 자신에게 '천천히' 해도 된다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던가?

살면서 늘 나는 나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고,

빨리빨리 해야 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고 이야기해 왔다.

내 삶의 절반 이상을 나를 몰아치며 살아왔다.


작년 겨울부터 마음을 돌아보면서

다른 지역에서 살아보고, 심리 상담을 받고, 그리고 억지로 쉬면서도

늘 무언가를 하지 않는 내가 너무 불안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다른 사람들은 성과를 내며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나만의 세상 속에 갇혀 멈추어 있는 것 같았다.

자꾸만 내가 뒤쳐지는 것만 같았다.


몸과 마음을 모두 달래는 그 시간 속에서도 나는

나 자신을 닦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석증이 찾아온 아침,

사람들이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천천히 움직이세요. 천천히 하셔도 돼요."


이석증은

쉬는 동안에도 나 자신을 닦달하는 나에게

쉬지 않으면 안 되는 기회를 선사했다.


쉬라고 말해도 쉬지 않고,

쉴 기회를 주어도 쉬지 않는 나에게

정말 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마지막 쉴 기회를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한동안 천천히 살고 나면, 나는 세상과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하지만, 생각보다 세상과 떨어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세상의 다양한 속도 중 조금 천천히 가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잘 쉰만큼 다시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아직은 모르겠다


쉼의 한가운데에 있을 뿐이다.

다 쉬어보아야 내가 어디 즈음에 있는지 알 수 있겠지만,

"천천히 하셔도 돼요."라는 말처럼

나를 닦달하지 않고, 조금은 천천히 하루를 살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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