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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민 큐레이터 Dec 15. 2017

티치아노의 다이애나

그림이 발레로 되살아나다

2012년.

발레계의 전설 모니카 메이슨은  54년간 몸담았던 로열 발레 단장직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은퇴파티 대신 기념비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00년 전 디아길레프가 만든 발레뤼스를 연상시키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이름은 ‘메타모포세스 티치아노 2012’. 그것은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한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의 그림 석 점, ‘다이애나와 액티온’ ‘액티온의 죽음’ ‘다이애나와 칼리토’의 영감이 된 <메타모포시스(변신)>을 주제로 세 편의 새로운 발레를 제작하는 일이다.


로열 발레의 단장으로 10년을 보낸 만큼 세계 문화계에서 모니카 메이슨의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공연에 관련한 다양한 분야의 정상급 인재들이 총동원되었는데, 세 명의 아티스트가 공연 전체의 시안 작업을 맡았고 일곱 명의 안무가가 투입되어 안무를 진행, 세편의 발레 작품을 선보였다.


한편 이 공연에 맞추어 내셔널 갤러리는 발레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티치아노의 원작 전시를 진행했고, 아티스트들의 무대 디자인 미니어처 작품 및 안무가들의 개별 인터뷰 장면 등을 같이 전시하기도 했다. 티치아노의 원화 세 작품은 고대 로마의 유명한 시인 오비디우스의 서사시 ‘메타모르포세스(변신 이야기)’에 묘사되어 있는 디아나를 둘러싼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그중 두 작품, 즉 ‘다이애나와 악티온’과 ‘액티온의 죽음’은 ‘메타모포시스’ 시리즈 중 가장 극적이면서도 끔찍한 줄거리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Titian, Diana and Actaeon, 1556-9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Titian, The Death of Actaeon, about 1559-75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사냥과 달의 여신 다아나가 님프들에 둘러싸여 목욕을 하고 있다. 사냥꾼 악테온은 우연히 신성한 그녀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순결한 디아나는 자신의 나신을 본 사냥꾼 악테온을 수사슴으로 변하게 만드는 복수를 행한다. 자신의 모습이 수사슴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악테온은 정신없이 도망가지만, 그가 항상 데리고 다녔던 사냥개들은 주인을 사냥감으로 알고 그를 물어뜯어 죽인다.


Titian, Diana and Callisto, 1556-9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발레라는 장르에 미술. 디자인. 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의 특질을 융합한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영국 문화 역량을 결집, 그 산물이었다. 그 자체가 문화적 메타모르포세스였던 것이다. 또한 100년 전의 발레 뤼스를 대신할 총체적인 예술 프로젝트가 이제까지 없었던 까닭에 런던은 흥분에 휩싸였다. 발레 뤼스란 1909년부터 20년 동안 이어졌던 고전발레의 어법을 전복시킨 전설적인 프로젝트였다. 디아길레프의 안무와 지휘 아래 이루어졌던 작업은 아방가르드하고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니진스키, 포킨, 파블로바, 마신, 카르사비나 같은 전설적인 무용수를 배출했다. 뿐만 아니라 피카소, 브라크, 사티, 샤넬 등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공동작업을 진행하는 기념비적인 일들을 만들기도 했다. 아마 모니카도 제2의 디아길레프를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2012년의 로열 발레의 ‘메타모포시스’ 역시 개성이 강한 미술가와 음악가, 안무가를 끌어안았기에 많은 평론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디아길레프적인’ 발레 프로젝트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메타모포시스 : 티치아노 발레’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성립되었고, 그 결과로 ‘머시나’ ‘침범’ ‘디아나와 악테온’등 세 작품이 탄생했다.


Edward Watson in Machina. Photo Johan Persson, courtesy of ROH

첫번째 발레 작품 ‘머시나 (Machina)’


웨인 맥그래거, 킴 브랜드스트럽이 안무를, 니코 멀리가 음악을 맡았다.


‘머시나’는 티치아노 그림 속의 디아나가 상징하는 여성의 절대적 미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한다. 미니멀리즘에 입각해서 극도로 절제해 만든 무대 공간에 조명이 무용수를 비추고 중앙에는 거대한 로봇이 자리한다. ‘무대의 극 중 인물을 올리는 기중기’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 ‘머시나 (machine)’ 로봇은 실제 이 작품의 배경이자 주인공이다. 티끌만 한 오점도 용납될 수 없는 원초적 단순미를 보여주는 공간 속에 바로크 풍의 선율이 원시적인 바람 소리처럼 흐르고, 발레리나는 어떤 부차적인 춤사위 하나 없이 철저히 절제된 움직임을 그려낸다. 무대 중앙에서는 현대미술가 콘래드 쇼크라스가 설계한 로봇이 발레리나의 동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패놉티콘처럼 지켜보고 있다. 이는 다음의 희생양을 노리고 있는 디아나 자신을 상징한다.


로봇의 움직임으로 표현되는 디아나의 분노는 티치아노의 그림 내용과 같다. 그림 속 디아나의 표정은 그녀의 비밀이 들킨 것에 대한 수치와 여기서 비롯한 분노였다. 동시에 그녀의 입은 위로 뻗은 그녀의 팔에 의해 가려진다. 이 제스처는 오히려 분노를 넘어서 그녀의 뇌쇄적인 몸매를 강조한다.


디아나의 표정 어디에서도 사냥감을 찾는 야만적 본성의 흔적은 읽을 수 없지만, 그녀의 숨겨진 야성은 그림 속 여러 가지 상징물에 의해 암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디아나의 얼굴 바로 위쪽을 보면 나뭇가지에 그녀가 사냥한 동물의 가죽 껍질이 매달려 있다. 이 나뭇가지에 부분적으로 가려진 동물의 해골은 뿔이 마치 나뭇가지에 엉켜 있는 듯하다.


오비디우스의 시에서 악테온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수사슴으로 변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달리기 시작한다. 뿔이 나뭇가지에 걸렸을 때 그를 따르던 사냥개들은 이 찰나를 놓치지 않고 먹이로 착각해서 물어뜯는데, 그림에서도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도록 복선을 깔아 놓고 있다.


Melissa Hamilton and The Royal Ballet in Trespass. Photo Johan Persson, courtesy of ROH


‘침범 (Trespass)’


알레스테 메리엇, 크리스토퍼 휠던이 안무를, 마크 앤서니 터니지가 음악을, 마크 월린저가 디자인을 맡았다.


두 번째 작품의 제목 ‘트리스퍼스 (Trespass)’는 근접할 수 없는 공간을 침범한다는 뜻이다. 달은 인간이 갈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다. 디아나는 달의 여신으로서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디아나의 신체는 머리 위 초승달 펜던트 모양의 악세서리로 더욱 강조되는데, 그 액세서리는 그녀의 신성을 상징한다.


마이클 월린저는 디아나를 달의 여신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레 전체를 구성했다. 디아나의 시중을 드는 님프들은 별들로 표현했고, 그들의 거울을 통해서 180도의 무대 전체를 한문에 볼 수 있었고 동시에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동작을 다양한 각도로 중첩해서 볼 수 있었다.


한편 앞서 말한 내셔널 갤러리의 프로젝트 전시에서 크리스 오필리가 회회 작품을, 쇼크로스가 로봇을 선보인 것에 비해 마이클 월린저는 발레 무대의 디자인과는 달리 전혀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설치미술인 동시에 퍼포먼스이기도 한 실험적인 개념이었다.


갤러리 전시공간에 들어가서 좁고 어두운 통로로 따라가다 보면 아주 작은 구멍을 통해 한줄기 빛이 흘러나오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관객은 자기도 모르게 그 구멍으로 다가서게 되고 그 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면 욕조 안에서 목욕을 하는 여성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 순간 관객은 이미 자기도 모르게 티치아노 작품 속의 악테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관음의 유혹과 그것이 선물하는 절대적 아름다움의 매혹에 빠지는 것이다.


‘디아나와 악테온 (Diana And Actean)’


티파니의 램프와도 같은 화려한 색채의 무대는 마치 손으로 그린 것과 같은 부드러운 느낌의 나뭇가지와 잎들이 다양한 색으로 펼쳐져 있고,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의상은 무대와 하나가 된 듯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디아나의 시중을 드는 님프들의 의상은 월린저가 무용수들에게 옷을 입힌 상태에서 손으로 직접 그린 것이었고, 이런 의상은 수석 발레리나 한 명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였다. 이처럼 관능적인 댄서들이 춤을 추는 숲 속의 장면은 20세기 초 야수파 그림을 연상하도록 만든다.


관음의 몽환적인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이내 악테온의 이성은 그에게 닥쳐올 비극을 직감하고, 그는 공포심으로 팔을 들어 거부하는 몸짓을 한다. 절망적인 비극의 원천인 절대적 미를 갖고 있는 디아나. 분노의 시선으로 악테온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서 관객들은 오히려 팜므파탈적인 강력한 관능미를 느끼게 된다. 그런 이유로 오필리가 디자인한 의상은 차가운 달의 여신보다는 오히려 불타는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연상시킨다.


이 작품은 세 명의 안무가가 참여했던 만큼 티치아노의 원화에서 느껴지는 놀라움, 분노, 경악, 공포, 갈망 등 다양한 감정이 섬세하게 표현됐다. 안무가들은 티치아노의 회화 속에 내포된 감정들을 이해했고 안무에 적용했다. 특히 작품의 제목인 디아나와 악테온의 감정이 교차하고 대립하는 장면의 모습은 “카리스마적인 듀엣(three pas deux)”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안무가 중 한 명인 앨러스테어 메리엇은 제작 관련 인터뷰에서 “티치아노는 여성을 아름답게 표현해야 하는 점에서 안무가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본다. … 그가 그림을 그렸던 당시에는 아마도 남성 관람객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전통적인 회화는 그의 말처럼 관람자인 남성을 위해 만들어졌다. 디아나는 미의 주체인 동시에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관음의 객체였음을 생각해보면, 안무가가 이 그림을 택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오비디우스의 시 제목 그대로 예술의 다양한 분야가 ‘변형’과 ‘변신’을 해서 하나가 되는 야심 찬 기획이었다. 또 마치 타인의 전문 분야를 훔쳐보듯, 필자는 이번 프로젝트를 이해하기 위해 발레와 시, 음악 전문가들의 인터뷰와 제작 과정을 되돌아보며 귀한 영감을 받았다. 이번 프로젝트는 시대와 장르를 초월하는 창의력의 힘을 알게 해주었고,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갔다. 명화를 읽어내는 수많은 기쁨 중 하나가 작가의 머리 속 우주를 엿보는 것이다. 안무가, 작가, 무용가, 작곡가 모두는 자신의 창의성을 최대한 끌어내 준 그때의 디아길레프, 오늘의 모니카 메이슨을 만났기에 힘든 작업을 자청했으리라.


김승민 큐레이터 #StephanieSeungminKim  #김승민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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