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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민 큐레이터 Nov 10. 2017

당신은 어떤 이웃입니까?

제 15회 이스탄불 비엔날레를 보고  

동양과 서양이 이어져 만나는 곳, 로마 제국 (330년 - 1205년)과 비잔틴 제국 (1261년-1453년)의 수도로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던 곳, 오스만제국 (1453년 - 1922년)의 수도로 까지 지정되며 그 때부터 <이스탄불>이라 불리운 이 도시는 2년에 한번 비엔날레가 열린다. 필자는 블루모스크,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등 유적지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미술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아쉽지만)


1994년 엘름그린 & 드라그셋 (Elmgreen & Dragset)작가 듀오는 코펜하겐의 작은 게이바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까마득히 몰랐던 이들은 알고 보니 같은길, 같은 건물에 살고 있었다.  (이 내용은 비엔날레 큐레이터의 글에서 쓰여져 있다. '눈에 띄지 않은 이웃이 제일 좋은 이웃인가?'라는 덴마크 사람 특유의 블랙 유머 감각을 그대로 전하듯) 이 술집에서 서로 눈이 맞아서 자연스럽게 집까지 같이 걸어오게 된 두 사람은 이후 연인으로 발전하여 여러 작품 활동을 같이 했고, 여러 도시에 함께 혹은 따로 살며 작업했다. 즉, 커플이었으나 지금은 각자의 파트너와 베를린에 살고 있다. 그리고 23년이 흐른 뒤 이스탄불 비엔날레 총괄 큐레이팅을 맡은 둘은 우리에게 ‘좋은 이웃’ 에 대해 질문한다.  


“당신에게 ‘좋은 이웃’이란 어떤 이웃인가?”


<좋은 이웃 (A good neighbor)> 이라는 제목 아래 열리는 제 15회 이스탄불 비엔날레는 큐레이터를 맡은 작가 듀오 작품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탄탄한 구성을 갖추고있다. 현재 터키의 정세가 굉장히 억압적인 지라 분명히 자체 검열을 신경썼을 것이다. 그래서 인지 '이웃'이라는 키워드로 폭넓은 정치적 상호 관계를 아우르는 작업들을 보면서 상징적으로 접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짐작이 갔다. 하지만 한국은 ‘이웃’들과의 관계가 워낙 불안한지라 어떤 작품은 필자에게 굉장히 불편하게 다가왔다. 마치 돌 하나 던지면 모든게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반영하듯.  


전시를 둘러보다가 한 방에 들어서며 우리를 훔쳐 보는 오싹한 눈빛의 작품에 화들짝 놀랐다. 피키토 차키히아니 (Vajiko Chachkhiani)의 영상 작업이 있었다. 퉁퉁한 중년의 남자가 뚤어지게 화면 밖을 응시했다. 마치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 처럼...

Vajiko Chachkhiani, Life Track, 2015, video by Stephanie S. Kim

‘저런 이웃이 있다면 스산하겠다’라고 농담을  주고 받다가 이가 불치병에 걸린 이들이 지내는 병동을 촬영한 작품이었단 걸 알게 되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언케니’라 불리는 이 감정은 아마 우리가 평소에 고개를 돌려버리며 괄시하던 대상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됐을 것이다.


엘칸 오즈겐 (Erken Ozgen)의 시리아 난민 아이를 담은 작품은 설명 없이 이해가 바로 가능했다. 벙어리 아이는 자신이 본 참혹한 장면에 대해 손짓과 표정으로 고통을 표현하고 있었다. 마음이 아퍼서 끝까지 보기 힘든 작품이었다. (한국 작가 김희천의 작품은 나에겐 오즈겐의 작품만큼 아펐다. 너무 강렬하게 다가온 나머지, 이 글에 차마 몇 줄로 요약할 수가 없다.)

Erkan Özgen, Wonderland, 2016 video by Stephanie S. Kim


무엇보다 가장 언케니한 작품은 리 밀러가 1945년 4월 30일, 히틀러의 집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종전 직전, 히틀러가 다른 도시에 숨어있을 때 히틀러와 그의 연인 에바의 두 아파트를 방문한 리 밀러는 그의 목욕탕에서 그리고 그녀의 침대에서 촬영했다. 작품을 보다 보면, 히틀러라는 세기의 악인에게서 평범성을 마주치게 된다.그때 느끼는 기묘한 감정은 독어로 ‘우임하이리히’라고 하는데 - 이 단어 속 “홈”이 바로 집이다.

D.E.Sherman, Lee Miller, Lee Miller in Hitler's Bathtub, 1945 © Lee Miller Archives

                                                   

이처럼 ‘이웃’은 집과 가정, 나라 등 폭넓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비엔날레에 전반적으로 현 정세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은 없었던 점은 따가운 눈초리를 받는다. 작년에 실패로 돌아갔던 터키의 또 다른 혁명 시도와 그 후로 이어졌던 주도자들의 죽음과 동조한 사람들에 대한 탄압이 있었음에도 그 어디에도 터키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담은 작품은 볼 수 없다고 말이다.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작업은 2013년 터키 반정부 시위를 보여주었던  라티파 에스학 (Latifa Echakhc)의 작업이었다. 마주 보고 있는 두 벽의 벽화는 다 헤지고 떨어져서 바닥에 루인처럼 쌓여있는 것이 마치 엄청나게 희망적이었던 지난 몇 년 전 순간의 영광 이후 이어진 비관주의를 보여주 듯 말이다.

Latifa Echakhch, Crowd Fade, 2017 copyright artist

작년 겨울, 한국 촛불 시위를 보면서 놀라워 하던 나의 터키 친구들이 기억난다. 요즘은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의 이웃 (혹은 동포?)에 보내는 경고에 매일 아침 신문 기사를 읽기가 무섭다. 이웃이라는 건 진정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토록 다양하게 읽히는 이웃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다시 동아시아의 얽기고 섥힌 역사를 생각하게 됐다.


김승민 큐레이터 (Stephanie S.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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