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상생을 꿈꾸며
쌩 쎄버린가의 자크 빈센트 인쇄소에 아주 희한한 일이 있었다. 고양이들의 대학살이 감행된 것이다. 1730년대 말에 있었던 이 이야기는 실제로 그 인쇄소에서 있었던 니콜라스 콩닷트가 증언했다. 그는 자신을 "제롬"이라고 "소설화'하면서 제롬과 그의 친구 레베이가 참담한 방에 살면서, 거지같은 음식을 먹고, 인쇄소 주인의 무참한 언행을 감당해야 했는지를 말했다.
인쇄소 주인이자 "부르주아"였던 마스터와 그의 부인은 25마리의 고양이가 있었다. 그중 부인은 "라 그리스"를 제일 이뻐했다. 하지만 이 고양이들은 밤새 울어댔고, 견습공들은 잠을 심하게 설친 채 매일 새벽부터 일을 해야 했다. 부르주아 인쇄소 주인과 부인은 매일 늦잠을 잤기 때문에 그들의 고충을 알 리 없었다. 지치다 지친 제롬과 레베이는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 인쇄소 주인과 부인이 잠을 자는 방 바로 지붕 위에서 고양이처럼 울어댄다. 부부는 잠을 눈곱만큼도 못 잤고, 결국 (복수를 원하던) 견습생들에게 고양이들을 처단할 것을 명령한다 (단 "라 스리스"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한다).
견습공들을 무참한 방법으로 고양이들을 처단한다.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고양이를 학살한 장면을 목격한 인쇄소 부분은 기겁을 했고, 자신들을 모욕함을 알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1984년 출판된 <고양이 대학살> 책은 로버트 단턴 교수(프린스턴 대학교 사학과)의 역사 서술로, 10년 전 대학원생인 나에게 강하게 각인되었던 것 같다. 잊고 있던 그 책을 한국을 잠시 방문한 며칠 전 책장에서 봤다. 다시 생각이 나 영국에 돌아와 대영 도서관에서 박사 논문을 쓰던 중에 찾아서 다시 읽어봤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장면이 다시 떠올라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양이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나카타 할아버지에게 갑자기 나타난 "조니 워커"는 나카타에게 고양이를 한 마리씩 죽이는 모습을 목격하게 한다. 자신을 죽이지 않는 이상 고양이를 계속 죽이겠다고 "살인"을 강요하는 장면에서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
단턴이 민담을 제시하며, 당대와 현대의 단절성을 증명함과 동시에 그 만의 주체적 해석을 했다면, 하루키는 시적인 (하지만 잔인한) 예시를 통해 '잔혹함'을 강요하는 권력의 구조를 상기시킨다.
영화 파라사이트의 오스카 신화를 분석하는 여러 신문 기사 중 "봉 감독이 자신의 아내가 부잣집 아이의 영어 과외를 했는데, 그가 나를 그 집 수학 과외 교사로 소개했다" (송혜진 기자)라는 기사가 내 머릿속에 박혔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입체적으로 영화화해서 전달했다. 큐레이터인 나는 작가들의 다양한 눈을 통해 세상에 이야기를 제시한다. 과연 나는 어떠한 이야기를 서사화할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 다양한 스펙트럼을 전달할 수 있을까.
김승민 큐레이터 의 사소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