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탓을 하지 않고

by 스테파노

모처럼 00 산으로 등산을 갔다.

등산했다는 말이 쑥스럽다. 늘 상 다니던 산책길 같으니.

00 산도 엄연히 산인지라 등산했다는 말이 맞지만.


산 냄새와 나뭇잎 냄새가 섞이어 공기가 상큼하다.

나무들은 어느새 이파리들과 이별하며

나목으로 변하고 있었다.

활엽수 사이에 이따금 소나무들이 청승맞게 서 있다.

언젠가 브런치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소나무의 처량한 모습을.

소나무는 가지도 별반 없이 가느다랗게 길쭉하니

머리에 빵떡 모양의 푸른 솔을 애처롭게 이고 있다.


활엽수와 침엽수의 영역 싸움에선 단연 활엽수가 우세하다.

땔감 용도로 나무가 쓰이던 시절에는

빨리 자라고 불에 잘 타는 활엽수를 많이 베어냈다.

그러다 보니 소나무 등 침엽수만 살아남아 산들은 사계절 늘 상 푸르른 줄 안다.


바위가 많은 악산(岳山)이니 마디게 자라는 침엽수가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부엽토가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 활엽수가 점점 침엽수 영역을 갉아먹는다.


사람 손이 나무들 경쟁에 미친 효과는 이리 크다니. 산은 변모되었다. 침엽수 위주의 산이 아니라 활엽수 위주로. 겨울로 들어서면서 활엽수 이파리로 가렸던 산은 벌거벗은 체 속살을 드러낸 모습을 보니.


능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소나무가 돌밭에 서 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발 축에 차이어

상처투성이인 뿌리를 부끄럼도 없이 다 내보인.


참으로 이상도 하다.

흙도 좋지 않은 돌밭이어서 뻗은 뿌리 속살이

다 드러난 나무인데도 다른 나무보다 훨씬 우람하다.


다른 나무들은 돌밭에 뿌리를 내릴 염두가 없었는지

햇빛 경쟁이 없어서 소나무는 햇볕을 독차지한다.

열등한 환경에서 자란 나무가 더 우람한 것은 무슨 원리일까?

남보란 듯이 이겨낸 열등감의 승리?


그 소나무는 생육 환경이 나빠서인지 천천히 크지만

풍성한 가지들을 내뻗고 제법 굵은 자태를 뽐낸다.


눈에 안 보이는 나무들의 뿌리 쪽 경쟁은 어떨까?

몇 해 전 태풍인가 거센 바람이 지나간 흔적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들이 대부분 넘어졌던 흔적이.


흙이 좋아 자양분이 실한 곳에서 자란 나무들이

그때 예상과 달리 바람에 쉽게 넘어졌었다.

아마도 나무는 힘든 노력을 하지 않아도 부엽토가 좋으니

뿌리 쪽은 안심하고 햇빛보기 경쟁에만 신경을 썼나 보다.


의외로 평소 매서운 칼바람을 견딘 나무들은 굳건했다.

나무도 환경 탓을 하지 않고 환경을 이긴 나무가

실하고 우람했다.


거소 이전의 자유가 없는 나무는

우리보다 더 각박한 경쟁을 할지도 모른다.

햇빛보기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소나무도 활엽수처럼 길쭉하니 볼품없이 자라난 것을 보니.



움직일 수 없는 나무들의 처연한 경쟁을 보면서 여유를 애써 부려 본다.

‘나는 어쨌거나 주거지 이전의 자유가 있으니,

수틀리면 복잡한 도시 생활을 접고,

한가로운 시골로 들어가지 뭐!’라고 하면서.


그나저나 경제도 갈수록 나빠지는 것 같은데 이러다 구조조정 바람이 불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이었으면 좋으련만….


새해에는 나에게도 구조조정 원리가 필요한 것은 아닐지?

잘 고르고, 고른 것에 몰아치듯 자원을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나에게도 적용할 필요성은 없으려나? 하산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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