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적극적이되 따분한 여행관

by 스테파노

마디 1


친구 1 : 주역에 여행에 관한 괘가 있는 것을 아나?

친구 2 : 그래, 그런 괘도 있나?


친구 1 : 여(旅)는 ‘나그네가 되어 여행하다’란 뜻이지. 여행은 뭐라고 생각하나?

친구 2 : 쉼이지. 훌쩍 떠나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쉬려고 떠나는 거지. 그렇지 않은가?


친구 1 : 맞네. 쉬러 가야지, 일하러 가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쉼이 일보다 더 복잡하게 가니, 원!

친구 2 : 주역에서는 뭐라고 했나?


친구 1 : 주역(56괘)에 보면 여행(旅)은 작게 뻗어나가는 것(소형, 小亨)을 말하지.

뻗어나감은 바로 적극성이지. 작다고 해서 적극성이 어디 가겠나?

적극적이되 작게 시작하라는 뜻이지.

친구 2 : 알 듯 말 듯? 쉽게 말하면?


친구 1 : 여행을 하면서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눈으로 보고, 이 일도 참견해 보고,

저 일도 고민해보는 등 그렇게 소소한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면 여행은 즐겁지.

그러면 골치를 썩이든 고통스러운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지.

친구 2 : 그런가? 일상의 문제를 적극적이되 아주 작은 모습으로 직접 해보다 보면 실마리가 잡힌다, 이거지!


마디 2


여행은 재미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다.

재미로 말하면 일상(日常)보다 재밋거리가 많은 곳은 없다.


여행은 일상의 재미를 버리고

일상을 떠나버리고 싶을 때 가는 것이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내일도 그렇고 그런 생활이 지속될 것이 예상되면

여행은 떠나는 것이다.


일상에서 탈출을 꿈꾸는 자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다.


여행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그것을 다 잊고

그냥 떠나는 것이 여행이다.

‘그냥 떠나는 것’이 굳이 여행의 목적이라면 목적이다.


그냥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면

역마살이 붙은 사람만 여행을 떠난다는 뜻은 아니다.

역마살이 붙은 사람은 일상보다 여행이 항상 좋은 사람이다.


여행은 일상이 싫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여행은 일상이 좋지만

일상의 그저 그렇고 그런 평온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여행에 무슨 의미를 붙여 꼭 가야 하는 여행은

여기서 말하는 여행이 아니다.


예컨대 백두대간 등정이니 올레길 탐방 여행이니

그런 것들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여행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여행이 일상보다 훨씬 더 따분할지라도 여행은 가는 것이다.


여행지에 가서도 ‘불편한 걸 왜 왔나(?)’라고

후회를 밥 먹듯이 해도

그래도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여행은 프랑스의 보들레르 시인이 노래하듯

일상과 마찬가지로 따분한 것이다.


‘여행지에서 별도 보고 파도도 보고 모래도 보았지만,

또 수많은 위기와 예측할 수 없었던 재난도 겪었지만,

그래도 따분한 게 여행이라네’라고 표현한 것처럼.

(알렝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중에서)


여행은 햇볕이 뜨거우면

차양이 커다란 밀짚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가다가 다리가 아프면 풀밭에 덜렁 누워서

하늘에 구름이 뭉실뭉실 피어나는 것을 한참 쳐다보고,


그것도 귀찮으면

지나가는 버스를 타 차창 가에 기대어 졸고,


기차를 탈 수 있으면

기차간에서 시집을 읽는 여유를 즐기고,


그렇게 쉬엄쉬엄 가는 것이 여행이다.


꼭 어디를 가야만 하고

꼭 무엇을 준비해서 간다면

그것은 일이지 여행은 아니다.


여행하다가 밭에서

고추를 따는 시골 아낙네의 푸념을 듣기도 하고,


논두렁에 앉아

새참으로 막걸리 한 잔을 얻어먹기도 하고,


버스 정류장 근처의 가게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소주 한 잔을 나누기도 하고,


5 일장 열리는 때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

말벗이 되기도 하고,


이따금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사진사가 되어주기도 하고,


그렇게 평소 못 만났던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사람 속의 사람, 나 안에 나를 느껴보는 것이 여행이다.


일상이 고달파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을 탈출하는 것은 맞지만

일상에 에너지를 넣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다.


악순환처럼 일상에 찌들고 찌들어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여행은 선순환처럼 일상에 기운을 불어넣고

약발이 떨어질 때면 기운을 다시 얻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것이다.


일상이 괴로우면

일상에서 남아서 괴로움을 해결해야 한다.

일상이 외로우면

일상에서 외로움을 달래야 한다.


괴로움과 외로움의 도피처로서 여행을 떠나면

여행 내내 괴롭고 외롭다.


‘떠난다’는 것에 의미라면 의미를 두고

가방에는 시집 한 권만을 챙겨서

떠나는 날 생각나는 대로 여행지를 정해 가면 된다.


여행은 일상처럼 혼잡하지 않으면서

어느 시인이 읊은 것처럼

‘쉰내 나는 보리밥 한 사발 찬물에 말아 나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이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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