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고 늘 그렇게(항, 恒)

-주역에서 본 생각거리 7

by 스테파노

엘리스란 심리학자에 의하면 나쁜 감정이 생기는 원인은

남들로부터 받는 비난에 있다.

수치심도 남들의 비난을 의식해서 생긴다.


엘리스에 의하면 수치심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스스로 합리적이지 못한 신념 즉 비합리적 신념을 키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피한다.


여기서 ‘비합리적 신념’이란 예컨대

‘나는 반드시 훌륭하게 일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참을 수가 없으며

나는 하찮은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합리적이지 못한 신념이다.


수치심을 심하게 겪은 사람은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자기에게 암시를 주어

이와 같은 비합리적 신념을 만들기 때문이다.


주역을 보자.


청년은 항 나라에 살고 있다.

겸손 문화가 지배적으로 흐르는 속에서

청년은 후배에게 책임자 자리를 빼앗겨 수치스러움에 쩔쩔맨다.


청년은 예의를 차려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지만

그 청년은 ‘내가 못나서 그럴 거야.’라고

자꾸 화살을 자기의 내면을 향해 쏜다.


이때 주역은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덕성을 변하지 않고 늘 그러하듯이 베풀지 않으면

혹여 수치스러움으로 이어질 것 같네요

(불항기덕 혹승지수, 不恒其德 或承之羞).”


여기서 덕(德)도 문제이고 항(恒)도 문제다.

특히 항(恒)이 엘리스가 말한 비합리적 신념을 키우게 하는 말이다.


덕의 행위는 ‘남에게 베푸는 행위’로써 어쩌다 한 번은 쉬운 일이다.

그렇다고 매일 매번 남에게 베푸는 행위를 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항(恒) 즉 ‘늘 변하지 않고 그렇게 하라니’

이때는 정말로 쉽지 않다.


남에게 베푸는 행위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 베푸는 것을 변하지 않고 늘 그렇게 하라면?

어떻게 이타주의적으로만 살 수가 있겠는가?

이기주의적인 마음이 하루에도 열 번씩 차오르는데.


주역은 그래서 덕(德)도 어려운데

항(恒)도 늘 변하지 않고 그러하듯이 하라니

그러면 또 수치심으로 이어질까 염려하고 있다.


이런 쉽지 않은 것을 지키라고 강요를 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겸손 문화가 흐르는 사회 분위기이다.

아니 그런 사회 속에서

주체성이 없이 화살을 자기 내부에다 쏘는 청년 바로 그 사람이다.


주역은 그런 비합리적 신념을 스스로 쌓고 있는 청년에게

‘방금까지 그런 덕(德)+항(恒)의 생활을 하겠다고

신념을 만들지 않았는가?’라고

직접 마주해서 진실을 알게 해 청년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엘리스 학파의 상담자들은

우선 비합리적 신념을 쌓고 있는 사람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게 해 스스로 고치게 만든다.


주역도 위에서 보다시피 그 청년에게 덕+항의 고통을

가슴 아프게 해 그런 스스로 잘못하고 있는 점을

보는 앞에서 지적하고 있다.

직면시킨다. 직면은 알게 하는 것이다.


즉 그 청년은 책임자를 빼앗겨 수치심을 겪고 있으며

그런 수치심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친절 등 먼저 나서서 베푸는 행위를

꼭 지켜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늘 변하지 않고 덕성을 베풀어야지 하면서

스스로 다그치고 있었다.


주역의 다음 구절이 더욱 의미심장하다.

다음 구절은 정(貞) 인(吝)이라고 하면서 말을 끝낸다.


즉 ‘참고 견디면 인색하네요.’라고.

덕+항에서 비롯된 비합리적 신념을 굳게 지키려고

참아내고 견디다 보면

오히려 매사에 소극적으로 인색하며

내 마음만 소중하게 여기는 행태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엘리스 학파의 ‘비합리적 신념’에 관한 논의는

1950년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잘해야 100년도 안 된 이론이며

요즈음에도 중요이론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런데 주역에서는 3,000년 전에 ‘비합리적 신념’의 문제점을 알고

치유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나만 그런가?

호들갑이려나?

주역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사람이 또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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