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탈출의 경로를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그저 줏대없는 다이어트만 반복해 댈 뿐이었다. 굶었다가, 또다시 먹었다가, 달려도 보고, 걸어도 봤다. 뚱뚱해서였을까. 이성에게 고백받은 적도 없고, 반대의 경우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창 좋을 나이’라는 말이 20대인 나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았다. 80대 노인의 하루처럼, 뭐 하나 설렐 일 없는 그저 그런날들의 반복이었다.
문득 얼굴에라도 정성을 쏟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잡지를 펼치니 나 같은 여자들을 위한 조언이 가득 실려 있었다. ‘여자는 눈과 입으로 말한다’는 제목의 그 지면은 이성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메이크업 필살기가 가득했다. 그윽한 눈매를 위해 숯검정 같은 스모키 화장법이 친절히 설명되어 있었으며, 여성미의 완성은 핏기없는 입술이라며 갈치 비늘색 같은 립스틱을 바르라는 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깟 화장품 한두 개로 나아질 미모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누구말처럼 ‘호박에 줄 긋는’ 매우 허망한 노동일 뿐이었다. 다시
태어난 것과도 같은 파격적인 방법이 있어야 했는데, 그것을알게 된 건 매우 우연한 장소에서였다.
“손님, 편하게 둘러보세요. 어제 막 신상들이 들어왔어요.”
날씬한 마네킹들이 입은 신상 옷을 만지작거리며 소심하게 가격표를 들춰 보는데, 직원이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내몸은 옷 가게에서 환영받을 사이즈가 아니었음에도 이 직원은 매우 친절했다. 그 호의가 고마웠다. 마지못한 듯 쭈뼛쭈뼛 들어갔다.
한눈에도 내 몸에 맞을 법한 사이즈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함께 쇼핑에 나선 날씬한 친구는 이 옷 저 옷 입어 보느라 바빴다. 매장 한편의 작은 의자에 앉아 친구의 패션쇼를 영혼 없이 관람하고 있는데, 갑자기 짧은 한 문장이 고막에 정확히 파고들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리
는데, 그 이유는 ‘생후 첫 날씬함’을 가져다준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넌 15kg이나 빠졌어? 난 겨우 9kg이야.”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된 매장 직원의 통화 내용에 귀가 쫑긋거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나살이 빠졌다는 것인지 어떻게든 알아내야 했다. 체면 따위 신경 쓸 처지가 아니라는 결단을 한 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싫은 내색 없이 친절히 알려줬다. 운동도 없이 단기간에, 그렇게나 많이 감량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모두 말해 주었다. 일단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곳에 가면 순식간에 날씬해질 수 있다고 했다. 순간 복권 당첨이 예정된, 꿈 잘 꾼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
녀의 날씬한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못 믿을 이유가 없었다.
음식이 돌로 보였다. 그동안은 돌이 음식으로 보일 때도많았는데 말이다. 기분도 좋아지고 업무 집중력도 높아졌다.점심시간이 너무 짧은 거 아니냐며, 우리나라도 프랑스처럼점심시간을 2시간씩 줘야 선진국 대열에 낄 수 있다며 열변을 토하던 나는 어디 가고 없었다. 새 모이만큼 남기던 내가,이젠 새 모이만큼 먹고 있으니 점심시간이 남아돌았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이뻐졌네!”
만나는 사람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인사를 건넸다.그러다 보니 매일 기분 좋은 날의 연속이었다. 예전 같으면아무 일 없이 짜증 내고, 별거 아닌 일에도 예민했던 나였다.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달라졌다. 야근이 많아도, 상사의 어이없는 꾸지람에도 웃으며 견딜 수 있었다. 예쁜 애들이 착하다더니, 미모의 힘이란 이런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식욕 억제제 부작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직접 경험하고야 말았다. 그날은 평소보다 길이 많이막혔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지루한 운전을 하고 있는데,문득 앞 차를 쾅! 들이박고 싶어졌다. 뭔지 모를 격렬한 충동이 어디선가 솟구쳤다.
‘내가 왜 살고 있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우울함과 허무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죽고 싶었다. 빵! 하고 터져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막히던 길이 순조롭게 뚫리면서 요동치던 감정이 잠잠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내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러다가는 정말 다 죽고 없어질 수도 있어.’
원인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낮에 용량을 늘려서 먹은 다이어트 약 때문이다. 그동안 끊고 싶은 생각이 들어 몇 번 중단을 시도하긴 했지만 늘 실패였다. 무섭게 폭발하는 식욕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은 더욱 나를 괴롭혔다. 어떤 날은 사는 게 우울했다. 만사가 싫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환경에 변화도 없고 특별히 달라진 게 없는 일상이었는데 말이
다. 이 우울한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약물 부작용에 의한 우울감 및 급격한 감정 기복.’
알고 보니 나뿐만이 아니었다. 식욕 억제제를 복용하는사람들이 호소하는 흔한 증상이었다. 감정 기복이 롤러코스터와 같아서 일상이 힘든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이 증상은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 유독 심하다고 했다. 나의 경우가 그랬다. 이러다간 죽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점점 식욕마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약으로 다스려진 식욕은 내 의지로는 통제할 수 없었다.그렇다고 단번에 약을 끊을 자신도 없었다. 이런 나를 다스려 줄 수 있는 강력한 무언가가 어디에 있지 않을까 싶어 매일같이 헤매고 다녔다. 마치 어제보다 독한 술을 마셔야만 직성이 풀리는 알코올 중독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