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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03. 2019

라떼는 죄가 없다.

꼰대에게 돌을 던질 자 그 누구인가?

"나 때는 말이야..."


최근 주가를 올리는 한 중년 남자 배우가 말이 그려진 커피잔을 들고 말했다.


"라떼는 말이야..."


나는 분명 그것을 "나 때는 말이야"로 들었다. 물론, 광고는 그걸 노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그 광고에 몰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십중 팔구는 월급을 받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머릿속으론 누군가를 선명히 떠올리며.


꼰대는 어디에나 있지만, 또 어디에도 없다.

어느 조직에나 또라이가 있지만, 스스로를 또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듯이 말이다. 꼰대에게 학을 떼거나, 누군가의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이 자신에게 온다 싶으면 마음과 귀를 닫는 사람은 수두룩하지만 스스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거란 착각이다.


리더는 꼰대일 수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리더는 꼰대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충고와 조언, 평가와 판단은 리더의 몫이기 때문이다. 리더는 각각의 개성과 가지각색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두루 모아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달려가기만 해선 안되고 '성과'도 내야 한다. 앞도 봐야 하고, 위와 아래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구성원들을 추슬러야 한다. 갈 길은 먼데, 눈만 껌뻑 껌뻑하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 거기로 왜 가야 하냐며 떼쓰는 아이와 같이 주저앉아 요동하지 않는 사람, 사춘기와 같은 질풍노도의 반응을 보이며 때늦은 반항을 하는 사람 등등. 그 과정 중에 결국 리더는 '외로운 꼰대'가 되고 만다.


용돈을 받을 땐 몰랐던 것들이, 어른이 되어 용돈을 줘야 하는 때가 오면 입장이 달라진다.

어렸을 땐 '용돈 아껴 쓰라'라는 말이 꼰대의 말처럼 들렸겠지만, 돈 버는 것이 그리 어려운 걸 알고 나면 자연스레 본인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온다. 잘 따라오지 않는 구성원들을 보면, '나는 안 그랬는데...'란 생각이 절로 머릿속을 파고든다. 그리고는 '나는 이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어!'라고 말을 하게 되는데, 스스로 '아차!'싶고 내가 지금 '꼰대'가 되었구나를 깨닫고 말지만 결국 그렇게라도 설득을 하려 시도해야 한다. 리더는 마음이 급한 사람이다. 그나마,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주려는 리더는 오히려 괜찮다고 봐야 한다. 닥치고 따라오라는 것은 아니니까.


사실, 역꼰대도 많다!


[직장내공] 저서에서, '역꼰대'를 언급한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말인데도 상대를 꼰대로 규정하고 스스로 귀를 닫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사실, 누군가의 '경험'은 충분히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이유도 결국 '간접경험'을 위한 것이고, SNS나 유튜브에서 화수분같이 이어지는 콘텐츠들도 모두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경험'이 '가치'가 되고, 그것이 결국 돈이 되는 시대인 것이다. 다만, 그것이 주위 누군가로부터 오면 그건 '꼰대의 말'이라고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무당보다 먼 데 무당이 용하다'고, 같은 충고나 조언을 들어도 그것을 책이나 SNS, 검색을 통해 들어야 뭔가 있어 보인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경에 보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두고 사람들이 동요하며 모세의 율법에 이런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으니,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예수를 시험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예수는 말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결국,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고, 그 자리에는 예수와 그 여인만 남았다.


꼰대에게 돌을 던질 자 그 누구일까?

살아오면서 꼰대질을 한 번도 안 했거나, 앞으로 정말 맹세코 누군가에게 충조평판을 하지 않을 거란 다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돌을 던지라 하면 나는 그리하지 못한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럴 것이다.


"라떼는 말이야..."


'라떼는 말이야'를 '나 때는 말이야'로 듣는 건 바로 우리다. 

나의 '라떼'는 누군가에게 '나 때'가 될 수 있고, 나의 '나 때'는 또 누군가에게 '라떼'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우린 누군가의 '라떼'를 '나 때'로 들을 수 있으며, 누군가의 '나 때'를 '라떼'로 들을 수도 있다. 무엇을 무엇으로 듣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라떼'건 '나 때'건 우린 그것을 유심히 듣고 구분해야 하며, 그 안에는 분명 어떠한 '경험'과 '의미'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해야 한다. 덮어 놓고 귀를 막거나, 설령 리더를 꼰대로 규정하더라도 저 사람이 왜 저러는지에 대한 입장은 고려하는 것이 좋다. 덮어 놓고 제 분에 못 이겨 충조평판을 하는 생각 없는 몇몇 리더가 있어서 그렇지, 그렇지 않은 리더가 더 많다고 나는 믿는다. 특히, 자신이 구성원이었을 때 받았던 비합리적인 상황이나 강요와 같은 충조평판을 기억하고, 리더가 되어 그러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오늘 나부터 그러하면 된다. 당신도 그렇다. 우리가 하면 된다.


'라떼'란 말을 들었을 때, '나 때'가 아닌 풍미 가득한 커피 향과 부드러운 우유가 (자연스레) 떠오르길 바라며.

(라떼가 뭔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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