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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l 23. 2019

어렸을 땐 몰랐던 맛들

'어른'이란 어렸을 때보다 좀 더 '위로'가 필요한 존재.

누군가에 나에게 언제 어른이 되었냐고 물으면, 난 생각이 많아진다.

어른의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적으로 '성인'이라는 세월의 통과의례를 거치긴 했으나, 그것이 스스로 나는 '어른'이다라는 호칭을 부르기엔 뭔가 한참 부족하단 느낌이다. 사람들에게 '어른'은 그리 어려운 단어는 아니지만 본인이 어른이 되었는가를 묻는다면 나와 마찬가지로 쭈뼛댈 것이다. 나이는 찼으되 철은 들지 못한, 왠지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것 같은 애매한 뒤끝이 남으니까.


사실, 어른은 스스로 되지 않는다.

사회의 통념과 제도, 그리고 세월의 증거인 육체 기준에 따라 사회와 사람들이 그 자격을 부여한다. 불혹을 넘긴 내 나이에, 나는 어른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에게 그러면 당신은 어른이냐고 되물으면 자신들도 허심탄회하게 대답 못할 거면서. 어른들의 아이러니랄까.

어찌 되었건 어른은 나의 선택이 아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였다면 피터팬이란 동화는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동화는 현실과 정반대 되는 이야기를 하니까. 


가끔 철든 행동을 하고 나서는 어른이 된 걸까 착각하지만, 어려서부터 변하지 않는 내 모습으로 회귀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면, 어른은 무슨...이라는 생각과 함께 아직은 멀었다는 푸념이 는다. 그렇다고 딱히 어른이 되고 싶지도 않다. 뭔가를 책임져야 하니까. 지금도 많은 책임을 지고 있지만,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책임을 지게 될까 두렵고도 불안하다. 그래서 나는 철이 덜 들고 싶단 욕구를 자주 느낀다. 때론, 죽도록 갈구한다. 


자신도 모르게 어른이 된 탓일까. 

그 스트레스 때문일까. 사람은 성장하면서 입맛이 바뀐다. 어렸을 땐 죽어도 못 먹던 음식을 커서는 미친 듯이 찾는다. 어쩌면 그 순간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어른의 입맛으로 변하면서 깨닫게 된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집밥이 최고다.


어렸을 땐 동네에서 놀다가 집에서 밥 먹으러 들어오란 소리를 듣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싫었다. 한참을 친구 녀석들과 재미지게 놀고 있었는데. 구수한 밥 냄새가 날 때부터 마음은 조급해진다. 어린 마음에도 노는 것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것이니, 그 밥의 부름을 거역할 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누구누구야 밥 먹어란 소리와 함께 개구쟁이들의 열정은 잠시 접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집밥이 최고라는 것을. 힘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누군가 나를 빨리 불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구누구야, 밥 먹어야지 이제!"


생각만 해도 눈물이 왈칵할 것 같다.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다. 아무리 간편식이 파다한 시대라지만, 무슨 음식이면 어떠할까. 그저 집밥이라면, 특히나 그 시절의 집밥이라면 나는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달려가고 싶다.


둘째, 건강을 생각하면...


나는 팔랑귀가 아니다.

나름 소신도 있고, 내가 추구하는 바와 호불호는 분명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귀가 팔랑일 때가 있다.


"그 음식이 눈에 그렇게 좋대!"


이런 말을 들으면 폭풍 검색에 들어간다.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선배들이 휴대전화 문자를 볼 때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리고 눈을 찡그리며, "노안이 왔어..."라는 모습을 상기하며 검색 속도는 더 빨라진다. 맛이고 뭐고, 입맛에 맞고 안맞고가 없다. 머리에, 눈에, 간에, 신장에, 관절에 좋다면 귀가 쫑긋 거린다. 물론, 모든 것을 다 구해다 먹을 순 없겠지만, 그 많은 음식과 효능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돈다.


셋째, 어린 음식과의 이별


어렸을 땐 누나와 과자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순전히 싸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하나가 남거나 하면, 어머니께 갖다 드렸다.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안 먹어도 된다고 하시면서 정확히 반을 쪼개어 주시거나, 그 하루 좀 더 예쁜 짓을 많이 한 사람에게 주신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 어른은 대단하다 생각했다. 과자를 안 먹을 수 있는 용기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다. 과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어렸을 때만큼은 아니다. 나의 두 아이들도 정확히 반으로 가르다 하나가 남으면 나와 와이프에게 가져오곤 하는데, 몇 번은 정말 내가 먹지만 대부분은 나도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반을 다시 나누어 준다. 어렸을 때 생각한 것처럼, 정말로 나이가 들면 달달한 과자가 덜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러다, 입에도 대지 못했단 고추, 마늘, 양파, 돼지껍질, 곱창, 대창 등.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탐닉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맹맹해서 무슨 맛인지 모르던 생선회는 일 년에 몇 번은 너무나도 당겨서 꼭 섭취해야 하는 필수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어린 음식과 이별하고, 어른 음식과 만났다고나 할까. 이건 어른의 힘일까 시간의 힘일까.



가만 돌아보니, 어른이 되어서는 음식이 '힘'뿐만 아니라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매콤한 양념의 어느 요리를 입으로 넣으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진짜 느낌이 나니까. 그래서 요즈음 먹방이나 셰프와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 유행을 한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거였다.

'어른'이란 어렸을 때보다 좀 더 '위로'가 필요한 존재. 생각지도 못했던 책임과, 예상하지 못한 삶의 무거움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 너와 내가 모두 자의가 아닌 타의로 어른이 되어야 하는 세상. 그러니 음식으로 위로를 받고, 더 큰 삶의 역경을 이겨내려면 입맛을 바꾸어서라도 살아내야지.


내일 저녁엔 뭘 먹고 위로를 얻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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