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측 모음을 아래 받침들과 조합을 해보면 '사람'이 되는데, 우연일까 의도일까를 의문한다. 그러다 결국, '우연을 가장한 의도' 또는 '의도를 가진 우연'이라고 결론 낼 수밖에 없다. '삶'은 사람과의 부대낌이라는 걸 살아가면서 몸소 느끼게 되니까.
그래서일까.
삶은 한 없이 소중하고 즐거워 보이다가도 어느 한순간 허탈하리만큼 힘들고 어두운 것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굴곡과 같다. 누군가와 잘 지내다가도 삐끗할 수 있고, 주는 것 없이 예쁘거나 반대로 누구는 주는 것 없이 밉다. 그러한 '누군가'는 내가 바라보는 상대일 수도 있고, 상대가 바라보는 나일 수도 있다는 것이 흥미롭고도 서글프다.
'나'와의 부대낌 나다움을 찾아가는 과정
사람들은 '사람'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직장이나 학교 등의 사회생활을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분명 그렇다. 작게는 친구나 심지어는 모르는 타인에게서도 사람 때문에 힘든 경험을 하곤 한다. 하지만 '사람 때문에 힘들다'라는 말을 하는 그 순간, 자신은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규정하거나 자신이 '사람'인 것을 잊는 묘한 심리적 과정을 겪는다.
즉, 나도 '나 자신을 짓누르는 사람'이며,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사람으로서의 나'는 스스로를 가장 괴롭혀온 사람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부터 세상의 빛을 보는 그 순간,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까지. 무수한 날들을 나는 나와 대화하고, 지적하고, 나무라며 살아왔다. 현실은 고만고만한데 이상은 높아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데는 이미 전문가가 되어 있는 모양새다. 실행하지도 못할 계획을 세워 놓고, 마치 거대한 절벽 앞에서 이것을 단숨에 뛰어넘지 못하면 '네가 그렇지 뭐'라며 스스로를 작게 만든다. 돌이켜 보면, 그 거대한 절벽을 어떻게 눈 앞에 가져다 놨는지가 더 신기할 따름이다. 스스로를 깎아내리거나 작게 만드는 백 한 가지 방법을 쓰라면 앉은자리에서 바로 책 여러 권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너'와의 부대낌 나다움을 깨닫는 과정
그런데, 살다 보면 우쭐댈 만큼 스스로를 대견해할 일도 생긴다.
삶의 흔치 않은 장면들이지만, 나조차 자신에게 놀라 흡족한 그 순간.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 누군가와의 비교에 한 없이 쓰러지고, 잘 나간다 생각할 때 마주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은 상처에 뿌린 소금처럼 쓰라리다. 또한, 누군가는 나와의 부대낌이, 내가 너와의 부대낌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이상일 수 있다는 건 살아가면서 기억하고 되새기려 애쓰는 것 중 하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다른 이와의 부대낌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더 잘 규정하고,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나와의 고뇌로 힘들 때, 누군가와의 갈등이 생기면 나는 나와한 편이 되어 그것에 대항하거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마주 보며 으르렁대다, 다른 존재와의 부대낌으로 마침내 한 곳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모양새다. 그래서 난, 다른 이와의 갈등을 그저 짜증 나는 일로 치부하기보단 그 속에서 나 다움을 깨달아내려 노력한다.
아, 이런 사람과의 갈등에서 나는 이런 반응을 보이는구나.
아, 어느 위치에 있어보니 내가 욕하던 사람의 행동을 내가 그대로 하고 있구나.
삶은 결국, 적당한 균형 잡기의 연속이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나 다움을 지키고, 너 다움을 존중하는 것'. 이것의 최접점을 찾아 나가는 게 정말 중요하단 생각이다. 나를 지키지 못하고 남을 존중하거나, 남을 존중하지 않고 나다움만 지키려 하면 삶은 고달파진다. 이미 우리는 고달픈 상황을 너무도 많이 겪어오지 않았던가. 그 상황들은 결국 어느 한쪽의 균형이 맞지 않아 일어난 일들이었음을 돌이켜 받아들일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나다움' 속에 '너다움을 존중하는 자세'를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내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고 삶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드는 정도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