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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23. 2019

모든 글에 의미를 담을 필요는 없다.

초심을 기억하면 순수함은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글을 쓰기 시작한 처음을 되돌아보건대, 그 시작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순수함의 무엇이었다.

목적도 없었고, 목표도 없었다. 그저 무언가를 쓰고 싶었다. 마구 표현하고 싶었고, 마음 깊은 곳 깊은 곳에 꿈틀대는 모든 것들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얻은 것이 참 많다. 꾸준함이 없다고 스스로를 꾸짖던 내가 나에게 보란 듯이 들이밀 수 있을 정도로, 글쓰기는 나에겐 위대한 자산이 된 것이다. 그동안의 못난 모습을 퉁치고도 남을 정도로.


그런데, 요즘은 글쓰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의미를 담아야 한다는 강박은 결국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다. 그전엔 찾지 않았던 목적과 목표를 세우려는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무언가를 표현하고 창작해내려는 수많은 존재에게 다가오는 예고되지 않은 형벌과 같을지 모른다. 글을 써야 하는데, 책을 내려하는 욕심. 한마디로 초심을 잃은 내 마음.


우리는 어린이의 순수함을 앙망한다.

똘망똘망한,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의 눈망울은 순수함 그 자체다.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엔 목적과 목표 따위는 없다. 그 어떠한 의미도 없다. 그저 만지고, 먹고, 싸고, 뛴다. 그러고도 마냥 즐거운 인생을 산다. 어른들은 모르는, 아니 애당초 잊은 삶의 묘미이자 즐거움. 분명, 예전에 저도 그렇게 살았었는데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글은 진실성이 옅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려 꾹꾹 누르는 자판은 내 손만 아프게 할 뿐. 의미를 깨닫고 글을 써야지, 글을 쓰며 의미를 만들려 하면 안 된다. 목적이나 목표를 가지고 스스로를 짓누르며 짜내는 글은 행복하지 않다. 글이 행복하지 않고 생생하지 않으면, 그 글을 쓰는 사람도 그렇게 된다.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은 유기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초심. 순수함.

나의 글은 순수한 아이처럼 그저 뛰놀고, 먹고, 싸고, 똘망똘망하길 바란다. 어른들의 시선으로, 이러한 글을 써야 하고, 누구를 위해 써야 하며, 어떻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은 잠시 잊고 싶다. 때로는 의미가 담기지 않고 배설된 글이라도, 다른 훌륭한 글을 보고 그것을 따라 하려 노력하더라도, 너무나 자유로워 그 어떠한 표현이 튀어나오더라도 말이다.


의미는 글에 있지 않다.

내 마음에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끄적거린 글도, 미래의 나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다. 해골에 고인 물을 시원하게 들이켠 원효대사는 마음으로부터 그 의미를 스스로 발굴해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일상의 그 어떠한 작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고자 노력한다. 글을 쓰고 난 뒤 받은 축복이랄까.


이제, 나는 모든 글에 의미를 두려 하지 않는다.

의미를 깨달으면 글을 쓰겠지만, 무언가를 포장하고 멋지게 표현하기보단 그저 마음에서 꿈틀대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그것이 마음과 머리를 거쳐 손으로 승화 하기를, 그래서 글로 환생하는 과정을 즐기려 한다. 초심을 기억하면 순수함은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글쓰기의 의미다.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대단한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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