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되었을 거야. 그 아이는 책가방을 메고 여느 아이들과 같이 학교를 오갔지. 단 하나,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달랐던 것은 그 아이는 어깨가 구부정하고 땅을 보고 걸었다는 것. 푹 숙인 고개와 처진 어깨는 그 아이가 얼마나 심적으로 왜소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겠지. 넓게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보도블록의 모양새를 하나하나 가늠했던 그 아이.
그래, 그 아이는 바로 아빠였단다.
살다가 가끔은 그때를 떠올려.
과거를 회상할 때 기억 속의 그 아이는 조금 많이 가여웠어. 땅을 보고 걸었던 건 아마도 바닥으로 떨어진 자존감을 찾기 위해서였을까. 내성적이고 당당하지 못했던 그 아이는 아마도 떨고 있었던 것 같아. 단언컨대, 그 아이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거야. 그래, 그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이 분명해.
그때의 아빠는 좀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항상 밖에 계셨던 어머니. 방황하는 누나. 홀로 남은 아이에겐 '사랑'이란 단어는 어쩌면 사치였을지 몰라. 그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 어린 나이였지만 아빠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아. 나는 누구일까. 왜 태어났을까.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까를 말이야.
하지만 답을 알아낼 리가 없었지.
어른들이 알려줘도 (사실, 어른들도 그 답은 알 수 없단다.) 모자랄 판에, 홀로 남은 아이는 그 어떤 가르침도 앞 날을 향한 안내도 받지 못했으니까. 자식을 위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본능적으로 느꼈지만, 아무래도 그 시절에 받아야 할 충분한 사랑의 양을 채우지 못한 건 사실이었어. 또한,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스스로 깨우치기 쉽지 않았지. 그러한 방법도 알지 못했고.
혼란과 무지로 인해, 그 아이는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걸었던 거야.
그래서 아빠는 너희에게 항상 강조한단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도, 돈도, 꿈도 아닌 '너희 자신'이라는 것을. 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태어나면서 우리는 가장 먼저 스스로와 연을 맺는단다. 태어나서 아빠와 엄마를 가장 먼저 만난 것 같겠지만, 그렇지 않아. 너희는 너희 스스로를 먼저 만나게 되었지.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는 것도 가족이나 친구도 아닌, 너희 자신이란다.
그러니, 너희는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법을 알아가야 해.
그게, 참 쉽지만은 않단다. 우리 스스로는 신경증에 걸릴 만큼 혼란스러운 존재거든. 프로이트가 말한 이드와 에고, 초자아는 오늘도 셀 수 없을 만큼 부딪치고 아웅다웅 해. 그러는 과정 중에, 나 자신의 볼 꼴과 못 볼 꼴을 다 보게 되지. 스스로가 가증스럽고 얄밉고 나 자신을 이겨 먹는 나에게 자괴감을 느낄 정도로. 하지만, 타인과도 갈등을 겪으며 좀 더 성숙해지는 것처럼 나 자신과도 그렇단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선, 나와 끝없이 부딪쳐 봐야 해.
무엇보다 '정체감'을 확립하려 노력해야 함을 잊지 마.
그것은 어떤 특성이나 역할의 집합이 아니라 '심리적 안녕감(Psychological Well-Being)'의 개념이란다. 건전한 정체감은 육체적 편안함, 추구하는 것에 대한 확고함,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또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을 수 있다는 내적 확신을 수반하는 것이야.
엄마 아빠가 너희를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로 정체성을 부여하고, 끝없이 인정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야.
엄마와 아빠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할 수 있는, 자기애를 바탕으로 하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고 싶어. 아빠는 받지 못했던, 그래서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걸 너무도 늦게 깨달아버린 가여운 아이를 떠올리면서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엄마와 아빠가 그 토대를 마련해준다고 하더라도 결국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너희 몫이란다.
앞서 말했듯이, 너희 스스로와 정말 많은 갈등과 시행착오를 거치게 될 거고, 내가 생각하는 나와 외부(사회)에서 인정하는 내가 달라 혼란스럽거나 자신감이 무너질 때도 있을 거거든.
마르시아라는 저명한 심리학자는 정체감의 단계를 4가지로 나누었어.
정체감 유예, 정체감 확립, 정체감 혼미, 정체감 조기 획득 또는 상실로. 이 4가지를 구분하는 핵심 인자는 '위기(Crisis)'와 '관여(Commitment)'란다. 즉, 직업 선택이나 이념적 신념과 같은 개인적 측면에 대해 얼마나 많이 흔들리고 고민하느냐, 그리고 그것에 얼마나 관여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정체감의 확립이 좌우되는 거야.
아빠는 너희가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일깨워 줄 거야.
그리고 그 토대도 마련해 줄 거고. 하지만,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건 스스로 이루어내야 할 일이란다.
그러니, 자신을 사랑하는데 누군가의 허락은 필요 없다는 걸 항상 기억하길 바라.
세상이 너희를 어떻게 보든, 타인이 너희에게 뭐라고 하든. 상대방은 존중하되, 잠시 틀렸다고 잠시 뒤처졌다고 주저앉아 자신을 원망하지 마. 살아가다 보면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이나, 남의 눈치를 봐야 할 때도 있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선 예외야.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