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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Sep 21. 2019

[접속] 상처 가득한 두 남녀는 만날 수 있을까?

(둥둥둥둥둥둥둥둥)
How gentle is the rain, that falls softly on the meadow...


길보드라는 게 있었다.

길거리 리어카 위에 가득한 카세트테이프. 종로 길거리를 걸으면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일제히 들리는 그 노래가 지금으로 치면 뮤직 스트리밍 앱 1위 곡이었는데, 때론 길보드에서 많이 트는 노래가 실제로 1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역주행의 신화도 모두 길보드에서 비롯된 것.


음악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요즘 어디선가 우연히 들은 'A Lover's Concerto'가 나를 과거 속 어디론가로 사정없이 채갔다. 'How gentle is the rain...'으로 시작하는 첫대목은 설렘 그 자체. 나는 어느덧 종로 한복판 끝없이 이어져있는 길보드 리어카들 사이에 서 있었다.


영화 '접속'의 OST.

나는 그렇게 1997년으로 '접속'을 해버린 것이다.


너와 나의 연결 고리


"유니텔로 온 거예요?"

한석규의 목소리는 '넘버3(쓰리)'와 '접속'에서 가장 빛난다. 성대모사를 하는 사람들 모두는 한석규의 그때 그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나저나 유니텔이라니. 라디오 PD 역으로 나오는 한석규가 스텝들에게 신청곡이 들어온 경로를 묻는 것이다. 유니텔이라니...


유니텔과 천리안.

당시엔 획기적인 컴류터 통신의 양대 산맥이었다. 전화 선을 PC에 연결하면 멀리 있는 사람과 언제든 이야기할 수 있는 세대. 이른바 통신 세대의 등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접속했다. 신인류의 연결고리가 생긴 것이다.


영화는 이 '통신'을 근간으로 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곤 두 사람은 마주하지 않는다. (정체를 모르고 스쳐 지나간 것은 제외하고.) 오직, 파란 화면 위 하얀 텍스트만이 그들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한다.


상처 투성이인 남과 여


그들의 대화는 말 그대로 짠하다.

자신의 상처를 얼굴 없는 상대에게 털어놓는다. 한석규는 자신을 떠나간 연인을 잊지 못하고, 전도연은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며 상처 받는다.


상처가 많고 커서였을까.

전도연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인공 눈물을 달고 산다. 그러니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며 받는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 말한다. 울지 않으니 슬퍼할 일이 없다는 것이지만, 관객들은 억수로 비가 오는 그녀의 마음을 쉽게 헤아릴 수 있다.

한석규는 차갑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다. 옛 연인을 잊지 못하는, 아니 잊지 않으려 하는 의지가 너무나도 강력하다. 그리고 그 의지는 곳 자신을 옭아매는 상처가 된다.


어쩌면 그 둘의 상처와 아픔은 상당히 아날로그적이다.

그저 바보 같은 순애보도 그렇고, 옛 연인을 잊지 못해 삶이 피폐한 모습은 80년대 노래 가사 속에서나 볼법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신파적이나 지겨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다시 보니 더 새롭다.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니, 그런 상처와 아픔이 보편적인 때가 있었다니.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을까?


만약, 유니텔을 전혀 모르는 세대가 이 영화를 (아무런 정보도 없이) 본다면 속이 터질 것이다.

"아니, 왜 톡을 안 하지? 아님, 핸드폰으로 전화 바로 하면 만나는 거 아니야?"라고 가슴을 팍팍 칠지도 모른다.


그들의 손엔 핸드폰이 없다.

우리 지금 당장 만나자고 할 수 없는 시대였다. PC 통신과 삐삐가 세상을 바꾸고 지배하던 때였다. 그 이상의 통신 수단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서로의 정체를 모르고 마주치는 그 둘의 모습은 미련하면서도 아련하다. 이미 주인공이 누구인지, 서로의 채팅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보는 관객들에겐 당시의 연출이 꽤 신선했을 것이다. 내 기억에도 그렇다. 얼굴을 모르고 이야기하는 상대가, 사실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니. 그러한 생각과 상황 자체가 무척이나 새로운 시대였다.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도 그 둘을 쉽사리 마주하게 허용하지 않는다.

상처가 많은 남자는 여자의 정체를 알고 고민한다. 기다리는 여자를 몇 시간이고 바라보기만 한다. 조금 늘어지는, 억지 긴장감의 고조로 보일 수 있지만 상처가 많은 주인공의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본다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한석규의 대화명이 'Happy End'였는데, 그 대화명은 이야기의 흐름에 내내 맞지 않았었다. 현실에는 없는 단어 같아서 그 대화명을 골랐다는 한석규였으니, 그 만남이 Happy End가 될지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둘이 마주했을 때.

'A Lover's Concerto'가 흘러나오며 결국 'Happy End'는 마침내 그 상황과 어울리는 대화명이 된다.




상처 받은 둘의 만남은 희망을 쏘아 올렸다.

아픔과 아픔이 만나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모양새다. 그 둘의 미래는 모르겠지만 'A Lover's Concerto'가 그 이후를 보장하는 것만 같다.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알고 있으니, 그것을 보듬어줄 거란 희망의 서곡으로서.


사실, 이 노래 말고도 'Pale Blue Eyes'라는 명곡도 기억에 남는다.

'Linger on your pale blue eyes'라는 가사가 돋보이는 이 노래는 한석규가 옛 연인으로부터 받은 'The Velvet Underground'의 곡이다. 그런데 이 곡은 전도연에게 더 잘 어울린다. 눈물이 나지 않는 전도연이 눈을 깜빡 거리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것만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마침내 서로 만난 그 순간. 전도연의 눈에 눈물이 그득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난다는 영화 속 대사는 너무나 뻔하지만, 그 대사를 듣는 순간 그렇다면 누구를 떠올려야 할까 고민하는 나를 발견한다.


아마, 이 영화를 보는 당신도 그럴 것이다.

그리곤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추억 속으로 '접속'하게 될 것이 뻔하다.



A Lover's Concerto 듣기


Pale Blue Eyes 듣기


포스터 자체가 아련한 느낌이다.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대단한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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