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근하고도 천근만근인 몸의 피곤함이 차라리 더 낫다고 느껴질 때. 마음의 무거움은 중력을 초월한다. 몸이야 물리적 법칙에 따라 지면이 있는 곳에서 그 무거움이 제한되지만, 마음의 무거움은 그렇지 않다. '쿵'하고 떨어지는 그 깊이가 기약이 없다. 내 육체는 물론 지면까지 뚫고 미지의, 무한대의 어두움 속으로 내내 떨어지는 느낌이 때론 오싹하다.
그럴 땐 마음을 돌봐야 한다.
운동을 하면 땀이 나고, 땀이 나면 기분도 개운해진다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었지만 오롯이 마음을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마음은 외부적 자극으로 어찌할 수 없는 본연의 것이다. 잠시 바꾸어 놓는 것은 될지 몰라도, 본질적인 관리를 하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쉽게 그 아픔과 피곤함이 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곱씹어보자니 대개는 내가 쓴 가면에 나를 맞추는 것이 힘들 때 그렇다는 걸 깨닫는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마음 즉, 영혼의 가면을 하나 쓰고 태어난다. 바로 '얼굴'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삶의 역할이 바뀔 때마다 우리는 가면을 하나씩 더 쓴다.
칼 구스타프 융이 말한 '페르소나'의 개념이자, 다른 말로는 '사회적 역할'을 말한다. 문제는, 하나의 가면을 벗고 다른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겹치고 또 겹쳐 써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가면은 '역할 가면'과 '감정 가면'으로 나뉜다. 써야 할 것도 많은데, 그 종류도 많다.
예를 들어, 나는 사회적으로 '남자', '어른', '부모', '직장인', '아들', '가장', '작가', '학생', '업무 파트너' 등의 '역할 가면'을 쓰고 있다. 그리고 나를 괴롭히는 상사 앞에서 웃어야 하는, 밥벌이의 고단함에 쓰러질 것 같아도 괜찮다고 해야 하는, 욱하는 일이 있어도 더 소중한 것을 지키자는 마음으로 감정을 숨기는 '감정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한다.
가면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트러블은 많아지고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신선한 공기를 받지 못하고 얼굴에 화장을 덕지덕지 해댄다거나, 여러 가면을 쓴다고 생각해보자. 분명 피부는 덧난다. 그리고 물리적인 무게는 늘어나며 고개를 떨굴 일이 많아질 것이다. 이런 법칙은 고스란히 마음으로도 적용이 되는데, 마음이 아프고 무거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가면들의 얽히고설킴 때문이다. 더불어, 제때 그 상황에 맞는 가면을 제대로 바꿔 쓰지 못하거나, 가면에 맞게 행동 또는 마음가짐을 가지지 못할 때 우리는 방황한다. 사회적 낙오자가 된 것만 같은, 나만 틀린 사람이 된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엄습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원형'을 잃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원형' 또한 심리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이 언급한 내용이다. 그것은 자신만의, 고유의 통합적 정신 기질을 일컫는다. 즉, 너무 많은 가면으로 정작 우리는 우리의 얼굴 표정을 잃은 건 아닐까. 웃고 싶을 때 웃어야 하고,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하는 아주 간단한 자연의 법칙을 너무나 거스르며 살지는 않았는가. 그래서 웃음이 멈추고, 눈물이 멈춰 마음의 병을 키워 온 건 아닐까.
우리의 마음은, 영혼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얼굴로 그것을 짐작한다. 오늘 내가 마주한 거울 속의 내 표정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안다. 그러한 순간을 많이 늘려야 한다. 고뇌하고 사색해서라도 그것을 알아내야 한다. 쌓여만가는 가면으로 내 표정이, 내 얼굴이 소멸되거나 풍화되면 마음이나 영혼까지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면을 쓰고 지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때론 그 가면을 잠시 벗고, 진정한 내 얼굴과 표정을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내 마음과 마주할 수 있고, 원형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어떠한지,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원형을 마주하고 나만의 방법으로 마음을 풀어주는 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사고 싶은 것을 지르는 모든 것들은 목적이 없는 게 아니라 결국 내 마음을 편히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흔쾌히, 가면을 다시 쓸 수 있다.
그것이 진정한 내가 아니지만, 결국 그것들이 모여 나를 이룬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또한, 가면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의 원형을 통해 나는 나대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용기와 함께.
너무 많은 가면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분명 있지만, 때론 굳이 우리 스스로의 원형을 그대로 노출시킬 필요가 없는 상황도 많으므로 우리가 가진 가면에 고마워하거나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도 삶의 지혜라 볼 수 있다.
가면을 쓰고 지낸 날들.
가면을 쓰고 지내야 하는 날들.
누구나 다 그렇게 산다.
'나'의 상태와, '나'의 본질을 잃지 않도록 하루하루 되새기는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