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당시엔 즐기는 게 아니라 무서움에 덜덜 떨며 봤다. 아, 다시 생각해보니 본 것도 아닌 듯하다. 전설의 고향을 하는 내내 나는 이불속에 있었으니까. 마지막 한 남자의 에필로그 내레이션이 나올 즈음에야 나는 빼꼼 고개를 이불 밖으로 내어 올라가는 자막을 봤었다. 그게 내가 가진 전설의 고향에 대한 주된 기억이다.
그렇게 이불속은 더없이 포근한 요새였다.
내 다리를 내놓으라던 총각 귀신도, 서럽게 우는 하얀 소복의 처녀 귀신도 그 이불을 어찌하진 못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TV 밖으로 나오는 귀신이 등장하고, 무서움에 덮은 이불 안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귀신 캐릭터가 나오면서 이불속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다. 사실, 무서움에 이불을 덮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서운 맹수가 나타났을 때, 고개만 땅이나 덤불숲에 처박는 타조와 다를게 뭘까. 정말로 위급할 때 이불을 덮어봤자, 위협의 대상이 그 이불을 쓰윽 거두면 그만 일 텐데 말이다.
컴포트존, 벗어나야 할까?
사람들에겐 저마다 '컴포트존(Comfort Zone)'이 있다.
인체에 가장 쾌적하게 느껴지는 온도, 습도, 풍속에 의해 정해지는 어떤 일정한 범위를 말한다. 물론, 이것은 물리적이거나 정량적인 조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서나 마음, 느낌에도 통용이 되면서 세상 고요하고 편한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 즉, 쉽게 말해 '편안함을 느끼는 구역'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컴포트존에만 머무르려는 성향이 강하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기업가인 세스 고딘은 "컴포트존에 머물 때 당신은 기분이 느긋해지고 긴장감 없이 일하거나 생활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는 실패의 두려움도 크지 않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에게 익숙해진 영역이어서 습관적으로 행동하면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리 어렵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른 아침 눈을 뜰 때 포근한 이불은 설명이 필요 없는 컴포트존이다. 하지만, 그곳에 계속해서 머무르게 된다면 어떨까? 학교에 지각을 하거나, 회사에 결근을 하거나. 또는 내가 있어야 하는 곳에 있지 않게 되면서 일어나는 많은 것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 당장 몸은 편할지 모르지만, 결국 마음은 불편해지고, 불편해진 마음은 영혼을 좀먹는다. 순간의 선택을 잘못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얄궂은 결과물들에 대해 자신을 한탄하며, 결국 이불속은 무시무시하게 무서운 곳으로 변하는 것이다.
컴포트존을 벗어날 때 얻게 되는 것들
익숙한 것을 벗어나려 할 때 우리는 '모험' 또는 '도전'을 하게 된다.
가지 않던 길로 가보거나, 보지 않던 영화의 장르를 보는 것. 매일 전철을 탔다면 버스를 타보고, 소설만 읽었다면 자기 계발서를 읽어 보는 것도 일종의 컴포트존 벗어나기다. 물론, 학교를 가거나 직장에 출근하는 것 그 자체로도 컴포트존을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불을 박차고 나오는 그 자체가 대단한 것이니까.
이렇게 컴포트존을 벗어나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
첫째, 내 삶의 영역이 확장된다.
가지 않은 곳을 밟게 되면, 그곳은 가봤던 곳이 된다. 그리고 그곳부터 다시 시작해 다음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 컴포트존의 매력은 나를 편하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생긴 불안은, 어느새 익숙한 것이 되면서 도전과 모험을 하는데 거리낌이 덜 하게 된다.
둘째,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여갈 수 있다.
사람에게 있어 공포와 불확실성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가련한 존재. 컴포트존에 갇힌 사람은, 어찌 보면 더 가련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저 편안함을 느끼며 다가올 미래를 기다리고만 있을 테니. 미래에 대한 불안에 압도당하지 않는 비결이 있을까 싶지만,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불확실성에 대한 최대의 대항은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컴포트존 밖으로 한 걸음 내딛을 때 가능한 일이다.
셋째, 생산성이 증가되고 수많은 영감을 얻게 된다.
불안과 불확실성이 마냥 나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편안함이 오히려 사람을 나태하게 하거나 생산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소 써지지 않는 글도 마감기한이 다가오면 어떻게든 써진다. 더불어, 다들 시험을 앞두고는 벼락치기를 했던 적이 있을 것이며, 갑자기 초인적인(?) 기억력이 발휘되었던 경험을 했을 것이다. 더불어, 코너에 몰리면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들도 짜릿한 성취를 맛보게 해 준다. 대부분의 발명품도 그렇고, 좋은 생각이나 아이디어들은 불편함과 불안감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는 '컴포트존'을 부정하진 않는다.
어렸을 때, 전설의 고향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던 이불속은, 세상 어떤 것보다 나에게 큰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었다. 그 안정감 속에서 한 번, 두 번, 세 번 용기를 내어 고개를 빼었고 시간이 지나서는 이불 없이도 전설의 고향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에게 컴포트존은 필요하다. 그것은 일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람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을 때, 그것을 벗어나 여행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다. 여행도, 도전도 모두 일상이라는 돌아올 곳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결국, 컴포트존을 벗어나는 것은, 내 일상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 되어 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