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과 대답 사이엔, 1초라는 순간이 존재할 틈도 없어 보였다. 명쾌하고도 확실한 그 대답에서, 나는 간절함이라는 또 다른 확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속 주인공의 것만이 아니라, 내 것도 진하게 희석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라는 것은 보편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야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보편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해도, 감독은 의도적으로 어떤 의미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 보편화의 과정이라 할 수도 있겠다.
‘생각이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 전반에 걸쳐진 주인공의 신념은, 우리가 자기 계발서에서 보고 들어 일상생활에서 행하고 있는 그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영화가 나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고 싶다는 이야기이고 그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는 잘 될 것이다’라는 신념 즉, 내가 나를 믿고 응원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성공’이라는 단어 앞에 초라해지기 십상이다.
평생 먹고살만큼의 돈이 있거나, 무언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사회적으로 큰 업적을 이룬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성공’이란 단어를 쉽게 가져다 붙이지 않기 때문이다. 때론, 내가 이룬 크고 작은 성공들을 스스로 다른 것들과 비교하며 아직 멀었다는 불필요한 겸허함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 앞엔 스스로를 괴롭히는 날이 즐비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미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분명 살아오면서 작던, 크던 무언가를 성취하고 성공이라는 기쁨을 맛보았을 텐데 우리는 왜 이리 성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인색할까? 내 주제에 성공은 무슨.... 이라며 스스로 가슴에 못을 박는 일도 허다하다.
무언가를 이루고 잠시 우쭐할 수도 있고, 남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도 성공이라는 의미를 끄집어낼 수 있는데, 자신에게 이렇게 못되게 구는 걸, 우리는 어디서 보고 배워온 걸까?
아이들은 성공이라는 것에 친숙한 존재들이다.
두 발 자전거 타기를 누구보다 두려워하던 아이들은, 내 손을 떠나 저들끼리 두 발 자전거를 굴리기 시작했을 때 세상 거만한 존재가 된다. 넘어질까 불안에 떨던 마음, 힘들게 잡아주던 아빠의 수고는 잊고 순간 맛본 성취감을 극대화하여 내재화한다. 그것은 앞으로 아이들이 커서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순수한 거만함’은 나이를 먹고, 사회에 부대끼며 점점 옅어질 것이다. 아무리 무언가를 이루더라도 ‘성공’이란 단어를 쓰는데 인색하게 된 지금 우리 모습과 같이.
사실 우리는 모두 잘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잘 된다는 것은 성공을 의미하고,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대답처럼) 성공한다는 것은 대접받는 단 말이다. 단, 대접을 누구에게 받아야 하는 가에 대해선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는 건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남들보다 더 높아지려 하고, 많이 가지려 한다. 내가 한 단계 올라가면, 두 단계 위 사람이 보이고 그 이상 위로 가도 더 위에 있는 사람을 보며 성공이라는 단어는 좀 더 위로 갔을 때 쓰자며 아껴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를 대접한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나를 대접하면, 성공의 기회가 많아진다. 넘어지더라도, 지금까지 온 거리를 성공으로 간주할 수 있다. 좋은 것들은 ‘추억’으로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경험’이라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영어 단어장 한 장을 넘기거나, 운동하러 문 밖을 나가기만 해도 우리는 성공했다는 말을 쉽게 가져다 쓰고, 그 성취감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어렸을 때 우리가 느꼈던 그 ‘순수한 거만함’을 추억하며.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공허함을 가지기보단, 과연 성공이란 뭘까를 재정의하는 게 어떨까.
더불어, 남들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짓밟고 오르려는 사회적 괴물이 되어가기보단, 스스로를 잘 대접하며 성공의 기운을 나누어 보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