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무엇인가'가 아닌, '사람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
인문학의 재조명
"기술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인문학과 결합한 기술이다!"
스티브 잡스가 이 말을 했을 때, 인문학은 때아닌 재조명을 받았다.
심지어 어느 회사에서는 인문학 전공생들을 뽑아 그들에게 소프트웨어 개발 교육을 시킬 정도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미친 듯이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 '인문학'이란 말만 들어가면 무언가 해답이 있어 보였다. 마치 녹차가루가 들어있으면 달달한 아이스크림도 건강식품이 되는 것처럼.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며 서로에게 물었다.
"대체, 인문학이 뭐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거지?"
인문학의 의미
인문학의 사전적 의미를 종합해보면, 그것은 결국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등은 결국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수단'이다. 즉, 인문학의 목적과 대상은 '사람'인 것이다.
고전과 철학을 접하고도 대체 인문학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빼놓고 '수단'에만 몰두했을 가능성이 높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면 삶은 혼란해진다. 고전을 독파하고 철학가들의 이름과 사상을 달달 외운다고 해서 인문학은 완성되지 않는다. 큰 착각이다. 그것을 통해 온전히 사람의 가치와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타인과 나를 이해하는, '자기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이 바로 진정한 인문학의 의미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넘어,
'사람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칸트는 그의 저서를 통해 세 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셋째, 나는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가?
나는 이 세 가지 질문에 소름이 돋는다.
이 질문은 '사람은 무엇인가'를 넘어, '사람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원을 넘어서는 질문이라 생각한다. 인류가 만들어 온 다양한 문화의 결과물을 토대로 이제 겨우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 칸트는 우리에게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더 적합하다.
물질은 정신을 지배한 지 오래고, 하루하루 스스로를 고찰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성은 말살되고 경제적 계급이 생기며 사람이 사람을 부리고, 무시하며, 목숨을 쉬이 여기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으니까.
그러니, '사람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마음속에서 끊이질 않는다.
인문학이 부족한 시대,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 시대
인문학의 돌풍은 그래서, 인문학의 부재를 방증한다.
물질과 기술에 주력하던 시대의 정서들이 '아차'하고 잊었던 본연의 '사람'이란 존재에 눈을 돌린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더 큰 경제적 부흥을 이루기 위한 '공부'로 매도된 것이 현실이다. 인문학의 부재는 곧 사람을 돌보지 않는 것이다. 세상이 흉흉하고,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이유를 우리는 돌아봐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뒤를 이어 '형이상학'을 계승한 칸트는, '존재의 근본'을 알아가는 수단으로 그것을 연구, 학문으로 정립하려 노력했다.
사색, 추론, 신념 또는 신앙 등은 형이상학적 진리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엔 '주체적인 자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SNS와 동영상 콘텐츠 등, 우리의 눈과 마음 그리고 말초신경을 혹하게 하는 것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아주 잠시 한 눈을 팔면 어느새 한두 시간은 그것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하고, 편리함이 배가된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의도와는 다르게) 우리의 정신과 시간 그리고 마음까지 병들게 하고 있다.
즉, 우리는 스스로 고찰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돌보지 않는 시대가 얼마나 팍팍한지는 살면서 몸소 경험하고 있으니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배려,
사람인 나에 대한 관심
영화 '킹스맨',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다운사이징'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염증'이다. 인류의 절반을 날려버리거나, 줄여버리려는 시도는 사람과 사람의 부대낌에 대한 염증이다. 이러한 영화들이 속속 나오는 것들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지쳐있다. 사람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으니 사람의 자격이 없는 서로들에게 염증을 느끼는 것이다. 피해의식과 분노, 갑질과 열등감 그리고 불공평이 판을 친다. 말 그대로 (사람으로서) 서로에 대한 배려가 없다.
더 무서운 것은, 나를 고찰할 시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사람'에 대한 배려는, 사람인 '나'에 집중할 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남의 아픔을 공감하고 남의 불편함을 알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다. '나'라는 존재를 알아차릴 시간도 없는데, 남을 배려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고전이 집필된 그때가 '사람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주제, 고민, 나아갈 방향에 대한 담론이 가득한 보석과 같은 메시지들. 그 시대엔, 물질이 정신을 덜 지배했고, SNS와 동영상 콘텐츠가 사색을 방해하지 않았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과 글이 나와 있다는 건 지금의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제목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통렬하다.
고전을 몇 개 읽는다고 인문학을 안다고 할 순 없지만, 하나를 읽더라도 그 안의 사람에 대한 시선과 고민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인문학에 좀 더 다가갔다고 할 수 있다. 철학과 미술도 마찬가지다. 사람이라는 힌트를 주는 그것들 자체에 취하는 게 아니라, 그 내면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굳이 고전과 철학을 뒤지지 않고, SNS나 동영상 콘텐츠를 통해서도 우리는 인문학을 접할 수 있다. 그저 그것들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콘텐츠는 왜 나왔고 그 이면엔 사람들의 어떤 욕구와 욕망이 있는지. 그리고 나는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에 대해 고민한다면 그 어느 고전 보다도 더 소중한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을 늘려가는 것.
우리가 인문학을 자주 접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