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편지를 쓰면 비로소 보일 것들에 대한 앙망을 담아
나이가 들어가니 혼잣말이 늘었다.
후회도 늘고, 한숨도 늘었다. 나는 앞으로 가고 싶지 않은데, 온 세상이 나에게 다가오며 얻은 것들이다. 걷고 있지 않아도,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느냐, 살아내느냐. 어쩐지 후자의 것이 더 친근하고 익숙하다.
그렇게 세월을 정통으로 맞고, 세상 풍파에 풍화되어 가다 보면 어른이 된다.
어른은 갈구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부지불식간에 주어지는 형벌과도 같다. 누군가 나에게 언제 어른이 된 것 같냐고 묻는다면,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던 그때를 떠올릴 것이다. 모든 선택이 오롯이 나의 책임이 되는 것을 느꼈던 그 순간.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개입할 수 없는 삶의 무게. 온전히 내가 풀어내야 하는 인생의 숙제. 마음은 여물지 않았어도, 나를 어른으로 규정해버린 세상은 더럽게도 야멸차다.
그런데 한 가지.
야멸찬 세상과 더불어 늘어난 내 혼잣말과 후회는 나를 마주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다. 한숨과 뱉어낸 후회엔, 여지없이 답장이 온다. 아픔과 비참함 그리고 살아내야겠다는 다짐. 물론, 환희로 뱉어낸 희망의 편지를 쓸 때도 있다. 가뭄에 콩 나듯 뱉어내는 환희의 순간에도 답장은 여지없이 온다. 고로, 나는 스스로에게 편지를 보내고 또 답장을 받으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편지를 좋아한다.
쓰는 것도 좋고, 받는 것도 좋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적어가는 정성은 진중한 순간의 결실이다. 또 그러한 결실을 누군가로부터 받는 것은 기쁨이자 위로다. 편지는 '만남'과 '말'을 대신한다. 대면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긴장과 설렘은 그것의 묘미다.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끌어낼 수 있는 순수함과 진실됨을 편지는 용인하고 기다린다.
편지를 쓰지 않으면 답장을 받을 일도 없다.
그러니 나는 편지를 계속해서 쓸 것이고, 계속해서 기다릴 것이다. 끝을 전제로 한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지금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갈구할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직접 묻기 껄끄러운 것들, 직접 말해주기 애매한 것들을 편지로 적고자 한다. 나와 나 사이라고 해서, 항상 대면하고 말을 나눌 수 있다는 자만은 접어두려 한다. 나도 모르는 나, 생각지도 못한 나는 내 마음이라는 우주에 무궁무진할 것이 뻔하니까.
인생을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려는 시대의 정서가 가득하다.
100세 시대라 그런가. '나이'가 전반과 후반을 나누는 잣대가 되곤 하는데, 그전에 전반과 후반은 왜 나뉘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는 게 좋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전략을 짜야하는 시간. 전반을 반추하고, 더 나은 후반을 기약하는 다짐.
전반과 후반의 시간이 같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난, 나에게 쓰는 편지를 기점으로 인생의 전반과 후반을 나누고자 한다. 그 편지 속엔 지난날의 반추와 다가올 날들에 대한 다짐이 녹아있을 것이다. 더불어, 지금의 나와 순수하고도 진실되게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나는 믿는다.
비로소 나에게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나에게 편지를 쓰면 비로소 보일 것들에 대한 앙망을 담아.
비로소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