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에 힘을 주어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은 결국 나임을 상기하면서
올해를 돌이켜보자니, 넘어졌던 해라 말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왜 넘어졌던 것일까 나는. 분명한 건 넘어지고 넘어진 연속의 시간들로 힘들었다는 것이다. 넘어진 기억조차 없는데, 나는 어느새 주저앉아 있었다. 당최 내뜻대로 된 것들은 하나도 없으며, 있다 하더라도 그렇지 못한 것들로 나는 요동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서글픈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나는 분명히 넘어졌고, 넘어졌다는 것은 뒤처짐과 동시에 자신의 못남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바닥에는 좌절과 불안이라는 요소들이 흥건했다. 왜 넘어지지 않으려 하는지 다시금 그 이유를 깨닫는다.
내가 넘어졌든, 누군가 나를 넘어지게 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넘어진 그것이 팩트이며, 나를 꾸짖거나 남을 탓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분명한 건, 넘어지면 그간 보지 못한 걸 보게 된다는 것이다. 무조건 앞으로, 빨리, 높이 가야 하는 존재에게 넘어짐이란 강제적 휴식이자 피동적인 돌아봄이다. 억울한 마음도 있고, 남들은 넘어지지 않고 잘 가는데 나만 넘어진 것 같은 상대적 박탈감도 있다. 넘어지지 않으면 좋으련만, 넘어졌다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인정해야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에.
군대에서였다.
땅을 박박 기면서 나는 들풀과 개미, 그리고 흙 알갱이를 보았다. 걷거나 뛰었다면 보지 못했을 것들. 그것들을 본다고 인생이 달라질까 싶지만, 분명한 건 넘어지거나 박박 기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관점과 시선이 넓어진 것이라 위로를 삼으면 수긍이 되는, 무언가 새로움을 받아들였던 시간. 의미는 찾는 자에게 오는 선물이지 않을까 싶다. 올해는 넘어진 해라고 받아들이는 나는 그 어떤 의미를 걷어들였을까.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도 넘어짐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받아들였더라도 억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넘어지더라도 내가 넘어지고 싶었고, 그 무언가에 엮여 뒤뚱거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일 때 무기력해진다. 내가 의도한 바와는 매우 다른 결과들이 주위를 엄습할 때 더 그렇다. 실재론이 아닌 관념론으로 자기 계발을 해내곤 하는데, 이럴 땐 관념론이 좋지 않다. 내가 스스로 받아들이는 세계가 어둡기 때문이고, 내가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이원론과 실재론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왜곡한다는 말도 있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와 세계를 분리해야 함이 맞아 보인다. 세상은 세상, 나는 나. 그렇게 구분 지을 때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깨달음과 억울함이 얽히고설켜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 사람이란 존재는 꽤 영리하다. 같은 날의 반복일 뿐인 시간의 흐름을 구간구간 나누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시간의 구분 중,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해'의 변화다. 하루, 일주일, 분기보다 더 큰 다짐을 할 수 있게 하는, 더불어 더 큰 희망을 볼 수 있게 하는. 작심삼일이 될지언정, 주저앉아 주위에 흥건한 좌절과 불안이라는 카드 속에서 '희망'이라는 카드를 집어 들어 다시금 다리에 힘을 줘본다.
넘어졌으니 일어나야 한다.
일어났으니 다시 넘어짐을 받아들인다. 나의 관념이 실재하는 한, 그것은 반복될 것이고 그러는 사이, 나는 성장할 것이다. 몸은 다 컸어도, 생각과 마음은 더 커야 한다. 그것의 성장엔 한계가 없다.
나는 넘어졌던 올해를 인정한다.
그것에 좌절하거나 분노하거나, 감사해하거나 오히려 잘되었다는 포장을 하지 않으려 한다. 일어난 일에 대한 해석은 다만 관점을 오염시킬 뿐이며, 감정의 기복을 부채질하는 과정이다. 그냥 다시 일어나려 한다. 본질에 충실하며, 나 자신에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그러면 넘어짐의 억울함도, 당황스러움도 차차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일어서는 새해를 맞이하려 한다.
일어나서 새해를 맞이하든, 새해를 맞아 일어서든.
다리에 힘을 주어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은 결국 나임을 상기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