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 치열함, 조화
나는 성숙하지 못하다.
아마 죽는 날까지 그러할 것이다. 누군가 "나는 완전 성숙에 도달하여 이제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나이 불문하고) 그 사람의 제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어쩌면 '성숙'이란 단어는 '자아실현'에 가깝고, 자아실현으로 가는 마라톤의 길목에서 사람들은 '성장'이란 물 한 모금 한 모금을 마시며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미치도록 성숙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할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걱정은 나를 기어이 앞으로 한 발 내딛게 한다. 이왕 한 발을 내디뎌야 한다면, 그러면 나는 기꺼이 나아가고자 한다. 다만, 내가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고 싶다. 어디론가 나서기 위해 집 밖으로 발을 내디뎠는데, 서성이다 그냥 집으로 돌아오기는 싫다. 발을 내디뎠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얻고 깨달아야 하는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집으로 다시 오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며, 오늘도 내게 부족한 아래의 세 가지를 추구하고자 한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
악마도 디테일에 있다.
큰 그림을 보고, 대충 해도 될 일들은 분명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습관이 된다는 것이다. 습관이 되면, 절대 그러하지 말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디테일을 간과하게 된다. 디테일을 간과하면, '신'과 '악마'가 행동한다. 독일의 건축가 루트비히가 인용하여 유명해진 '신은 디테일에 있다'란 말은 철저하게 그리고 세세하고 무언가를 챙긴다면 기회가 생긴다는 뜻이 담겨 있다. 반대로는, 문제점이나 불가사의한 요소는 세부사항에 숨어 있다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란 말이 있다. 즉, 우리는 디테일을 놓치면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해결할 기회를 잃거나, 대충 다 되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문제가 되어 돌아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큰 산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넘어지는 것은 작은 돌부리 때문이다. 작은 돌부리에는 자만, 허영, 게으름, 대충대충이란 말들이 새겨져 있다. 작은 것을 돌아봐서 무엇하냐는 자만, 큰 게 되면 작은 건 알아서 된다는 허영, 중요한 걸 알면서도 디테일을 돌아보지 않는 게으름. 그리고 대충 해도 된다는 선택적 긍정.
세상을 이끌어가는 위대한 영웅이나 위인들은, 이 디테일에 주목한 경우가 많다.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수백 척의 왜적 함선을 침몰시킨 것도 '울돌목'의 조류가 바뀌는 디테일에 집중한 결과다. 뒤쪽엔 어선들을 병풍처럼 배치시켜, 마치 수백 척의 지원군이 있는 것처럼 연출하는 디테일도 보였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이라는 인류의 문명을 바꾼 혁신의 출발도 결국 미니멀리즘이라는 사람의 본질로부터였다. 무언가 더 큰 보여주기 혁신에 목을 매거나, 현재 기술이 최선이라는 '대충'이라는 '해충'을 스티브 잡스는 경계한 것이 분명하다. 'Connecting dot'이론도 남들이 보지 않는 작은 것에 신경 쓴 결과다.
마지막으로, 영화 '살인의 추억', '설국열차'와 '기생충'으로 세계적 거장이 된 봉준호 감독의 별명은 '봉테일'이란 걸 볼 때, 나는 다시 한번 더 디테일함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삶에서 언제나 치열함을 추구하라고,
삶을 만끽하라고 배웠다.
우리네 삶은 치열하다. 아마도 그래서 본전 생각이나 억울한 마음이 가득한 것 같다. 주 5일 근무, 주 40시간이 발효되면서 세상은 많이 변했다. 시대의 변화도 있다. 성장이 있던 과거에는 치열함이 미덕이었다. 어차피 열매는 맺고 떨어질 텐데, 그 열매를 받아먹기 위해선 어떤 형태로라도 치열해야 했다. 하지만 그 치열함은 대개, 무언가를 빼앗거나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었다. 본질에서 벗어나 늦게 남아 일하는 것이 미덕이고, 아첨이나 정치를 잘해야 출세하던 시대의 자화상이 그 예다.
하지만 지금의 치열함은 좀 다르다.
일찍 퇴근하고 여가를 허용하다 보니, 이제는 그렇게 치열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는데 난 이것이 대단한 착각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장은 멈추고, 일자리는 줄고, 수명은 늘어나는데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면 나는 더 치열해야 한다. 예전의 치열함이 떨어진 열매를 더 많이 가지려는 치열함이 었다면, 오늘날의 그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일찍 퇴근한다고, 주말에 여유가 많다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직장에서는 주어진 시간에 업무 몰입의 정도를 더 높여야 한다. 자칫, 열매가 어차피 없을 거란 체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이제는 '열매'를 스스로 피워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전보다 더더더더 치열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간과한 것 같다. 결국, 나를 위한 치열함이란 생각으로 조금은 더 힘들지 몰라도 나는 그러해야 한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니나 베르베로바는 '치열함'을, 삶을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이라 정의했다.
과연 그 말이 맞다. 충분히 만족할 만큼 느끼고 즐기기 위해선, 우리는 극한의 정도에 올라야 한다. '만끽'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치열함'으로 극에 다다랐을 때 맛볼 수 있는 열매인 것이다.
행복은 생각, 말, 행동이
조화를 이룰 때 찾아온다.
인생은 균형 맞추기다. 절대로 맞추어질 수 없는 균형을 맞추려 오늘도 우리는 고군분투한다. 이럴 땐 신이 얄궂다 생각된다. 마치, 균형이 절대로 맞추어지지 않는 시소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그 균형이 이루어질 때 너희는 행복을 느끼거나, 완벽한 삶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순간, 찰나에 그 균형은 맞추어질지 몰라도 그것이 유지되는 법이란 없다.
일에 몰두하면, 가정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고 그 반대인 경우는 직장에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면 해야 하는 일로 버겁고, 해야 하는 일만 하고 실면 하고 싶은 일이 아쉬워 맘이 무겁다. 이성적인 사람은 감성이 부족하다 하고, 감성이 충만한 사람은 이성이 부족하다 손가락질당한다. 돈은 많아도 인성이 부족한 사람, 인성은 완벽한데 돈이 없는 사람. 다 가진 것 같지만 어느 한 날 한 순간에 훅 가는 사람들도 많고, 다른 사람이 볼 땐 행복해 보이지만 정작 저 스스로는 우울증에 허덕이고 있는 존재들은 무궁무진하다. 뭐 이리 균형 하나 맞니 않는 세상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고자 한다.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저글링을 하다 보면 우리는 공의 개수 하나하나를 늘려갈 수 있다. 공의 개수엔 한계가 있고, 결국 언젠간 공을 떨어뜨릴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공 하나 또는 두 개로 어설프게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닌가. 최소한 공을 몇 개라도 더 늘려보고자, 능숙하게 다루어보고자 하면서 우리는 성장하게 될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행복은 생각, 말, 행동이 조화를 이룰 때 찾아온다.'라고 하였다.
동의한다. 아니, 깨닫는다. 무슨 일인가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돌이켜보면 과연 나의 생각이나 말, 행동이 문제인 경우가 많다. 그 조화와 균형점을 완벽하게 맞출 순 없어도 과도하게 벗어난 균형 또는 떨어뜨린 저글링 공은 결국 나에게 깨달음의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니까. 그 순간을 잽싸게 알아채야 한다고 나는 깨닫고 또 깨닫는다.
사람은 성숙해진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 다만, 그것은 시간이나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더불어, 나의 성숙함이 다른 이의 그것과 맞지 않아 삐걱대거나 상대적으로 폄하될 수 있다. 그러면 분명 문제가 생긴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디테일', '치열함', '조화'를 떠올릴 것이다. 다짐한 그것들을 추구하고 있는지, 제대로 실행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을 것이다. 이전에 하지 못했단 절망은 희망으로 회복하고, 빠르게 깨달으며, 실행에 총력을 기울이다 보면 무언가 나아져도 나아지지 않을까.
성숙과 성장이란 에너지는 시간이나 다른 사람의 말에서 오는 것이 아닌, 결국 나의 다짐과 노력 그리고 깨달음과 실행에서 온다.
나는 그것을, 온몸의 체중을 실어 그렇게 믿는다.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