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봐도 글쓰기는 최고의 인문학이다.
인문학이 필요한 시대
스티브 잡스의 한 마디로 세상이 요동한 적이 있다.
기술만으론 충분하지 않고,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건 인문학과 결합한 기술이라 말했을 때. 인문학의 검색량은 늘어갔고, 어떤 회사는 인문학 전공생들을 뽑아 기술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더불어, 그 당시 거의 모든 책 제목에는 '인문학'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인문학'에는 그 어떤 힘과 해법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체 인문학이 뭐고,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시 고전을 읽다가, 잠시 미술을 공부하다가, 잠시 역사를 공부하다가 이게 인문학이 맞는지에 대한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인문학이 무엇인지와 그래서 스티브 잡스가 말한 인문학으로 어떤 성공 사례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의와 사례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대체, 그 시대가 바란 '인문학'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을 '왜'라는 본질이 아닌, '어떻게'에 매몰된 정서들이 만들어낸 해프닝이라 말하고 싶다.
인문학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 어학사전 -
The study of language, literature, the arts, and philosophy, sometimes including religion - 영영사전 -
그런데 어쩐지 사전적 정의도 완전해 보이진 않는다.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를 공부하면 완성되는 게 인문학일까? 여기에 '왜'를 대입해보면 답은 나온다.
고전, 언어, 문학 등 우리가 '인문학' 그 자체라 생각했던 것들은 결국 수단이었던 것이다.
망치질 하나 배웠다고 집을 지을 수 있다고 착각하거나, 분명 망치질을 열심히 배웠는데 왜 집을 짓지 못하는지 회의하는 것과 같다. 집을 짓기 위해선 미장도 배워야 하고, 수도 배관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인 기술들을 득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인문학은 끝이 없다. 사람을 공부하는데 끝이 있을까? 나 자신조차도 하루에도 수십 번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의 본성은 절대 인문학을 멈추지 못하고, 또 멈춰 선 안된다.
우리는 인문학을 지금까지 해왔고,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해야 한다.
고전과 명화를 보는 것도 좋지만 바로 우리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인문학이다. SNS에 올린 사람들의 사진, 글 그리고 가족들과의 마찰 갈등. 왜 사람들이 하루 날을 꼬박 새우고 제주도에 있는 돈가스 집에 몰리는지 등. 인문학은 우리 생활 안에 들어와 있고, 우리는 인문학의 범주에 있다. 물론, 그것에 대한 '왜'라는 의문을 가질 때 그 공부와 배움에 대한 깊이는 더 커진다.
글쓰기는 최고의 인문학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글쓰기는 최고의 인문학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고전이나 명화 등을 보면 우리는 감동한다.
그러한 감동은 우리가 누구이며, 왜 살고 있으며,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그게 핵심이다. 흔들린 마음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영감을 얻어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누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 옛날 작품들에는 사람에 대한 오롯한 고뇌와 고찰이 깊게 배어있다. 인터넷도 없었고, 오락거리가 그리 많지 않았던 아날로그의 시대에는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집중의 농도가 짙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들을 접하는 것은 (매우 좋지만) 간접적 경험이다.
때론, 누군가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들 나는 그 어떤 작품에서 감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글쓰기는 직접적으로 나를 관통한다. 어떤 주제라 할지라도, 내 머리와 가슴 그리고 정서를 흠뻑 묻혀 나오게 되어 있다. 글을 쓰려면 나를 만나야 한다. 생각을 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해서 존재하는 거라고. 그렇다면 글쓰기만큼 생각을 많이 하고 존재를 인식하기에 좋은 것이 없다.
사람 공부의 시작은 바로 자신으로부터 여야 한다.
우리 주변이, 우리 생활이 인문학이라는 말은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공부하는 학문이니 당연한 말 아닐까. 아무리 많은 학문으로 사람을 공부하더라도, 사람을 완벽히 다 알 순 없다. 학문은 사람에게서 나온 부산물일 뿐이며 그 부산물들은 사람이라는 전체를 규명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왜'라고 물어야 한다.
그러할 때 심심해 보이는 일상이, 따분한 시간이, 절망스러운 내 생활이 인문학으로 거듭난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가장 좋은 점이 바로 이것이다. '왜'라고 묻는 것. 우리는 왜 태어났고, 왜 돈을 벌어야 하고, 왜 인정받기를 원하는지. 그것에 대한 고찰이 하루하루를 관찰하게 만든다. 그저 지나치던 것들을 관찰한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소득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지만 반대로 자세히 보아야 그 대상의 진정한 모습을,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말도 있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왜'라는 의문을 온 일상에 던져야 하는 이유다.
그러면 삶은 기하급수적으로 풍부해진다.
"지나고 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쉽게 말하지 마세요.
저는 아직 지나기 전이거든요.
지나고 나면 사람들은 깨닫는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깨달음은 지나고 나면 온다. 꼰대들이 하는 말에 반감이 큰 시대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알게 된다. 꼰대들이 한 말이 다 맞다는 걸. 자기 계발서의 대부분이 '관점'을 바꾸라고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그 이야기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도 마음이 헛헛하고 무언가 도움이 절실할 땐 서점에 가서 자기 계발서를 뒤적거린다. 나는 '자기 계발서' 불패를 믿는다. 저마다 깨달음의 크기와 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시작하면 그렇게 삶을 다르게 볼 줄 안다.
내가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알 수도 있다. 그저 넘어졌던 어제를 뒤로하고, 나는 왜 넘어졌는지 이 모든 건 어디에서 왔고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각성을 하게 된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글쓰기를 통해 나를 카메라 앵글로 볼 수도 있다. 삶을 다르게 보게 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나를 만나고, 왜라고 묻고, 삶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 준다.
그러나, 나는 글쓰기가 적성에 안 맞거나 잘하지 못하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글쓰기는 거창한 게 아니다. 꼭 어떤 글 한편을 끝장내야 하는 게 글쓰기는 아니다. 장황한 일기를 꾸준히 쓰자는 것도 아니다. 책을 읽었거나, 영화나 강연을 봤거나. 아니면 지금 바로 문득 드는 생각을 메모지에 흘려 적어도 좋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나의 생각과 감정을 적는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보다, 우리는 휴대폰에 바로 적을 수 있는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