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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Feb 16. 2020

글쓰기엔 허탈함이 없다.

글을 쓰면 또렷해진다.

성취 뒤의 허탈함


공항에서 수하물 노동자로 일하며 음악의 꿈을 키우던 이민자 출신의 아웃사이더.

그의 이름은 '파록버사라'다. 그는 보컬을 구하던 로컬 밴드에 들어가게 되면서 '프레디 머큐리'라는 이름으로 밴드 '퀸'을 이끌게 된다. 무려 6분 동안 이어지는 실험적인 곡 '보헤미안 랩소디'로 대성공을 이룬 그는 스타가 아닌 전설이 된다. 그 영향력은 너무나 막강해서 당시를 떠올리는 몇몇 사람들은 그 시대엔 영국에 두 명의 여왕이 있었다고 할 정도다.


초점 없어 보이던 파록버사라의 눈빛은 강렬해지고, 가지런하지 못해 추해 보였던 치아는 가창력을 끌어올리는 매력이 되었다. 거칠 것 없이 이어지는 성취. 말 그대로 승승장구.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의 슬퍼지는 표정을 숨죽이며 집중했다. 솔로라는 욕심, 성 정체성의 혼란, 술과 파티에 중독된 삶. 성취와 외로움은 비례관계가 되어갔고, 외로움의 원인은 허탈함이었다.


사실, 이러한 패턴은 프레디 머큐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연예인,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돌아봐도 발견할 수 있다. 무언가를 크게 갈망하다 그것을 이루었을 때, 그 뒤에 오는 후련하면서도 공허한 마음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 공허함을 잘 이해하면 또 다른 성장의 기회가 되지만, 그것에 휘둘리면 방황은 끝이 없게 된다.


책 출간의 허탈함


나에겐 책 출간이 그랬다.

첫 계약서에 미세하게 떨리던 손으로 사인했을 때의 생생함. 내 이름 석자가 적힌 표지안이 나왔을 때의 설렘.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의 첫 장을 넘길 때의 벅참.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 부단히도 바쁘고 요동하고 설레발쳤던 나는, 출판과 함께 세상이 그리고 내 삶이 뭐가 바뀌어도 바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공허함이 밀려왔고 나의 글쓰기는 멈춰 섰었다.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왔는데, 그 목표가 사라지니 성취감을 느낄 새도 없이 몸과 마음이 멍해져 버린 것이다.


이젠 무얼 쓰지?
이젠 뭘 해야 하지?


그 뒤에도 책 출간을 이어갔지만 처음과 같은 설렘은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성취 뒤의 허탈함에는 조금씩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책이 나온다고 인생이 확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이루고 나면 그다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안 것이다. 나는 그 허탈함을 직시했다. 그리고 다음을 위한 에너지로 삼았다. 목적을 상기하고, 다시 목표를 세웠다. 즉, 어떠한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글쓰기를 통해서였다.


글쓰기엔 허탈함이 없다!


지금에 와 돌아보니, 나는 글쓰기로 허탈함을 달래고, 또 이겨낼 수 있었다.

'책'을 쓰지 말고, '글'을 써야 한다고 온 체중을 실어 강조하는 이유다. '책'은 목표이자 수단이지만, '글쓰기'는 목적이자 본질이다. 글이 모여 책이 된다. 책을 쓰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실용적이지만 단기적이다. 그리고 단기적 목표가 사라지면 방황할 가능성이 높다. 긴 호흡을 가지고 글을 쓰다 보면 책이 되는데, 책이 출간되어도 허탈하지 않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지속되기 때문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 목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단기적 호흡이다. 글쓰기라는 목적을 지속하면, 책이라는 성취(목표)는 절대 공허하지 않다. 호흡을 차분히 길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글쓰기는 마음을 돌보는 힘이 있다.

기쁠 때도 쓰고, 슬플 때도 쓰는 이유다. 성취감도 쓰고, 허탈함도 쓴다. 글쓰기는 모든 것을 포용한다. 그 포용 앞에 나는 온갖 것을 쏟아 놓는다. 나의 치부, 마음, 감정, 생각, 고통, 슬픔, 기쁨. 그리고 영혼까지. 허탈함이 느껴지려 할 때 글을 쓰면 그 허탈함을 다른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허탈하고 공허한 상태는 무언가를 채워야 하는 상태기 때문이다.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상태.


비단, 책 출간의 경우만이 아니다.

나의 본업에서 이루어낸 것들, 성취한 것들 그리고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중에 맞닥뜨리는 아픔들. 나는 그 모든 것을 수렴하려 노력하고 글쓰기는 그것들을 포용해 준다. 그러니 안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감정이란 것은 크기와 범주가 없는데, 글쓰기는 그것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다는 게 나는 지금으로서도 놀랍다. 왜 진작 글을 써오지 않았을까. 왜 이제야 난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지나간 허탈함들에 동정을 보내며, 나는 오늘도 쓴다.




생각해보면, '성취'라는 큰 기쁨을 맞이 했을 때, 그 기쁨에 취해 자신을 잃는 게 가장 큰 문제란 생각이다.

무언가에 취한다는 건, 사리분별이 흐려지는 것이니까. 흐려지는 사리분별 안에 내가 희석되어 있을 때 허탈함과 공허함은 더 커진다. 그 느낌은 무언가 다른 게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없는 무서운 순간이다.


그러니 또렷한 정신으로 글을 써야 한다. 

아니, 글을 쓰면 또렷해진다. 

글쓰기엔 허탈함이 없다고 믿는 이유다.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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