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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Feb 16. 2020

써본 적 없어서 글쓰기를 주저하게 될 때

'근본 없음'의 다른 말은 '시작할 수 있는 용기'

'근본 없음'의 힘을 보여 준 명감독


정형화된 방식을 비꼬는 비선형 구성.

순차적이지 않은 시간의 흐름. 복잡한 장면 배열. 두 가지 이상의 이야기를 엮어 놓는 다중 플롯. 때로는 흑백과 컬러를 오가며 관객을 농락하는 화면. 맥거핀(영화에서 중요한 것처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극적 장치 -작가 주-)으로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조롱의 대화를 마구 집어넣는 대사까지.


기존 영화의 법칙을 모조리 부순 그는 독립영화의 산실 선댄스 영화제는 물론,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그리고 셀 수 없는 영화제의 상을 받게 된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들도 다수 만들어내며 그는 말 그대로 명감독이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쿠엔틴 타란티노'다.


그는 영화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 20대에는 캘리포니아 맨해튼 비치에 있는 비디오테이프 가게 점원으로 있던 게 다다. 우여곡절 끝에 감독으로 데뷔한 '저수지의 개들'의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영화 촬영 장면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 앵글에 찍혀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영화는 판타스틱 영화제 수상을 시작으로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이후 펄프픽션, 재키브라운, 데쓰프루프, 킬빌 등을 통해 쿠엔틴 타란티노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한 세계적 감독으로 우뚝 섰다.


B급 영화 요소를 가미하여, 이것을 주류 영화로 재창조해내는 선구자.

많은 영화 평론가들이 그가 독보적 영화감독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근본 없음'으로 꼽는 이유다.


글쓰기의 시작은 '무(無) 근본'


무언가를 시작할 땐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몰라서, 잘할 수 있을까란 걱정으로. 그러한 두려움을 걷어주는데 '근본 없음'은 큰 역할을 한다. 그것은 용기다. 해서, 나는 가끔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려 할 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떠올린다. 시작부터 완벽히 하려는 욕심은 버리고, 내가 부족한 것을 인정하며. 더불어, 어쩌면 나의 가장 개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나의 글쓰기를 돌아봐도 그렇다.

문예창작이나, 국문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문적으로 글쓰기를 어디서 배운 적도 없다. 아무리 글쓰기가 대중화된 시대라지만,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몇 권 연달아 나온 걸 보면 사실 나도 놀랍다. 예전엔 문체나 문장력이 대단해야 책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고, 실제로 그래야 출판이 되었으니까. 나는 나의 문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표현하고 싶은 걸 많이 표현해내지 못하는 그 부족함을 한탄한다.


만약, 시작점에서 그 부족함을 우려했다면 난 글쓰기를 시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하며 가장 잘 한 점은, '근본 없이'시작했다는 점이다. 글쓰기 학원에 등록을 하고, 책을 100권 이상 읽기 전까진 글쓰기를 시작하지 말아야지 생각한 게 아니라 무조건 쓰고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 글들을 되돌아보아 쓰레기이면 치우면 되고, 자산이면 안고 가면 되겠다 생각했다. 하루에 몇 개를 써야지, 언제까지 책을 내야지 하는 목표도 세우지 않았다. 근본이 없어도 좋으니, 그저 시작하고 싶었다. 내 생각과 마음을 따라 써내려 가기로.


물론, 모든 시작이 또는 누구나 그러해야 하는 건 아니다.

철저히 준비하고 시작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기초를 다지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기초를 다지다 지치거나 그 단계에 매몰되어 쓰러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내 삶에서 끄집어낼 수 있기에. 때론 근본 없이, 그 용기를 가지고 무작정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다짐했던 것이다.


'무근본'은 '근본'을 낳고,
'근본'은 '뿌리'를 내리고 확장한다!


'근본'이란 원뜻은 '사물이나 생각 등이 생기는 본바탕', '식물의 뿌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근본(근본 없음)'을 그리 긍정적이지 않는 단어로 생각하는데, 나는 좀 다르다. 하얀 본바탕은 무엇이든 채울 수 있고, 기존에 있던 뿌리에 편승하기보단 나만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시작점을 나는 '무근본(근본 없음)'으로 정의한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전업작가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출간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백지에 그려진 가지각색의 글과 생각들이, 이 세상을 다채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글을 쓰며 문체나 문장력에 집착하기도 한다.

'잘 쓴 글'이란 정의에는 문장력과 내용, 줄거리와 구성 등. 모든 게 포함되어 있고 특히 문장력은 작가의 수준을 가늠한다는 시대의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들에게서 나는 범접할 수 없는 그들의 아우라를 느낀다. 그래서 간혹 그 문장들을 필사하곤 하지만, 그저 따라 하진 않는다. 나만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구어체'다. 말하듯이 편하게. 앞에 누군가와 차 한잔을 한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듯이 써 내려간다. 강의를 하며 나도 모르게 내 머리와 입에서 튀어나온 것들을 소중히 주워 담아 글을 쓰기도 한다. 실제로, 내 저서를 읽은 많은 독자 분들의 리뷰에서, '편한 선배와 함께 앉아 차 한잔 마시며 상담한 것 같다'라는 글도 자주 본다. '술술 읽힌다', '읽기 쉽지만, 내용은 깊다' 등의 말들도 함께.




시작엔 두려움이 있지만, 설렘도 있다.

앞 뒤 재지 않고 시작하는데 열정이 필요한데, 열정이 있다면 '무근본(근본 없음)'은 큰 힘이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글쓰기 강연을 하며 받는 질문들에는 "내 이야기를 써도 될까요?",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는데 괜찮을까요?", "문장력이 달리는데 써도 될까요?"란 질문들이 있는데, 나는 흔쾌히 괜찮다고 말한다. 그 대답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그려면서 나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이야기를 꺼낸다. 나의 글쓰기와 출간 과정도 이야기한다.

그가 해서, 내가 해서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열정과 설렘 그리고 하얗게 어서 자신을 채워달라는 근본 없는 자신만의 도화지를 발견하길 바라면서.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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