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그 사이 어느 한가운데에. 내가 있다.
먹고사는 것의 고단함
정신없이 눈떠보니 세상이다.
밝은 빛에 놀라 악을 쓰며 탯줄과 함께 세상을 맞이한다. 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그때부터, 아니 모태부터 우리는 먹고사는 고단함에 떠밀린다. 이유를 모르는 떠밀림은 치욕스럽다. 그러나, 치욕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우리는 먹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치욕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다니, 이보다 더 큰 치욕이 있을까 싶지만 그러한 감정은 고단함에 밀려 이내 사치가 된다.
우리는 먹고사는 것에 눈을 뜨며 어른이 돼간다.
어렸을 땐 달달한 막대 사탕 하나에도 행복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것의 가격을 헤아린다. 사탕은 내 노동의 대가와 치환된 무엇 아니던가. 높아져버린 당 수치 때문에 사탕은 멀리하고, 나만 먹여 살리면 되었던 삶에서 누군가를 함께 먹여 살려야 한다는 벅차고도 박한 족쇄를 차고 나면 세상은 나를 대하는 게 달라진다.
그렇게, 삶은 먹으면서 유지된다.
동시에, 삶은 유지되며 고단하다.
심신상관
고단한 삶 속에서 우리는 마음의 안정을 추구하려 한다.
우리는 '심신상관[心身相關]'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신상관'은 마음의 움직임이 생명 활동의 움직임과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즉, 마음이 편해야 몸도 편하고,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되면, '심'과 '신'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몸과 마음. 영혼과 육체가 상관하여 서로를 응원하고 보듬어줘야 하는데, 자칫하다간 다른 것을 배척하거나 무엇 하나만 중요하다 착각한다. 몸에만 신경 쓰느라 마음을 돌보지 않는다거나, 마음만 중요하다 생각하여 육체 활동은 금기시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할 때 우리는 망가지고 쓰러진다.
혹여라도 몸과 마음을 따로 생각하려 드는 시도가 일어난다면, 그 순간을 득달같이 알아차려야 한다.
둘 중 하나를, 또는 그 둘 다를 돌아볼 수 있도록.
글쓰기와 먹고사는 것의 상관관계
나는 '글쓰기'와 '먹고사는 것'의 관계가 '심신상관'이라 생각한다.
'글쓰기'는 '심'이고, '먹고사는 것'은 '신'이다. 글쓰기는 마음을 돌보는 일이고, 먹고사는 것은 몸을 챙기는 일로 보는 것이다. 즉, 마음과 몸을 둘 다를 돌봐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려는 애씀이다.
'고단함'은 몸에 일어나는 반응이다.
하지만 이 고단함은 마음으로 전이된다. 몸으로만 고단하면, 어쩌면 우리는 먹고사는 것을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몸의 고단함은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래서 우리 삶은 때때로 서럽다. 몸의 고단함이 넘쳐올라 그것이 전이되어 마음까지 고단해지면 우리는 나약해진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아파하고.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을 돌봐야 하는데 '글쓰기'는 마음을 돌보는 특효약이다.
마음의 감기에, 피로에, 상처에 참 좋다. 글쓰기는 빨간약이 되고, 붕대가 되며, 반창고가 된다. 건강할 때의 글쓰기는 비타민 이상의 효과를 낸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작용은 곧 몸과도 연결되어 좀 덜 찌뿌둥한, 좀 더 활기찬 (먹고) 삶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그렇다고 글쓰기가 만병통치약이란 이야긴 아니다.
만병통치약은 뭐니 뭐니 해도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고 흐르면, 무엇을 돌아보아도 미화된다. 풍화된 기억은 추억으로 바뀌고, 서슬 퍼런 악감정의 파도도 잔잔해지고 만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 시간을 견뎌내게 하는 힘이다. 그저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를 쓰고, 지금의 나를 적으며, 미래의 다짐을 명기하는 것. 글쓰기는 시간의 흐름 안에 존재하며, 시간의 흐름은 나의 글에 오롯이 배어든다.
나는 오늘도 먹고사는 고단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고단함은 마음을 헤아리라고 귀띔한다.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글을 쓴다. 나를 관통하여 나온 글은 다시 고단한 몸을 어루만진다. 그러면 덜 고단해진 몸은 또다시 감사한 내일을 기약한다.
글쓰기와 먹고사는 것의 상관관계.
딱 그 사이 어느 한가운데에. 내가 있음을 알아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