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Routine'이란 영단어를 외울 때, 그것은 그리 긍정적인 단어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판에 박힌, 정해진 일상이라는 뜻이었으니 그도 그럴만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반복되고 고정된 무언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우리 삶엔 판에 박힌 무언가가 있어야 그것을 중심으로 더 넓은 영역을 확장할 수 있고, 불확실한 세상으로부터 덜 흔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일상은 우리가 떠올리는 대표적인 루틴이다.
일상이라는 루틴은 언뜻 보면 좀 지겨워 보이게 마련. 아침에 일어나 씻고 직장이나 학교, 또는 육아로 향하는 생활이 반복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기력해진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일상을 벗어나 보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진다는 것이다. 일상이 지겨워 떠난 여행, 또는 어떤 사고나 큰일이 닥쳐 일상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할 때. 판에 박히고, 반복되어서 지겨운 그 일상이 그렇게도 그리워지는 것이다.
즉, 루틴이 있어야 우리는 떠날 수 있고 일탈을 꿈꿀 수도 있으며, 조금 멀리 갔다 싶을 땐 또다시 루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루틴의 종류
그러다 깨달았다.
루틴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첫째는 만들어지는 루틴이고 둘째는 만들어가는 루틴이다. 전자는 내 삶의 패턴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것들이다. 노력해서 만들었다기보다는 삶이 흘러가는 대로 생겨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반복되는 것들. 아침에 일어나 씻는 것,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는 것, 통근이나 통학을 위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 것들이 그렇다.
또 다른 루틴은 내가 만든 루틴이다. 퇴근 후 운동을 하는 것, 아침에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보는 것, 하루 중 언젠간 글쓰기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는 것. 그리고 시간을 내어 책을 읽는 것 등. 처음엔 잘 되지 않는 것들도 하루하루 반복하다 보면 그것은 루틴이 된다.
그래서일까.
이젠 '판에 박힌'이란 말이 긍정적으로도 보인다. 내 의지를 판에 박거나 새긴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것을 반복해나간다면 어떨까. 예전엔 루틴이란 단어를 보면 '지겨움'이란 뜻이 생각났는데, 요즘엔 '꾸준함'이란 의미가 떠오른다. 더불어, 내가 만들어 온 루틴은 무엇이고 앞으로 만들고 싶은 루틴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한다. 어쩐지 그것이 내 남은 삶을 잘 이끌어가 줄 것이란 기대가 들어서다.
글쓰기를 위한 나만의 루틴 만들기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상 루틴은 이미 유명하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고,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달리기를 한다. 절대 무리하지 않고 일상의 루틴을 빠짐없이 지켜나가는 것이 글을 쓸 수 있는 비결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즉, 그들은 일상의 소중함을 안다. 창의적인 일을 한다고 해서 충동적으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게 아니라, 중심을 지키며 흔들리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들의 루틴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없다.
전업 작가도 아니니, 내 일상 루틴을 모조리 글쓰기를 위한 것으로 세팅할 순 없는 것이다. 먹고사니즘을 해결해야 하는 일이 더 우선이고,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나는 글쓰기를 계속할 것이고 글쓰기는 내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용기이자 위로라는 것이다. 이제는 솔직히 글쓰기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난 글쓰기를 위한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간다.
내가 글을 써오며 반복했던 것들을 돌아보고, 앞으로 글을 더 오래오래 써 나가도록 만들고 싶은 루틴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먼저, 나의 글쓰기 루틴을 돌아본다.
본업이 있으니 업무 중에는 글을 쓰지 않는다. 대신, 중간중간 떠오르는 깨달음과 영감들은 곧바로 메모한다. 메모에 적힌 생각들은 퇴근 후 늦은 밤이나 주말 저녁에 글로 피어난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얻은 묘미다. 예전엔 생각만 하고, 특별하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사라지는 것에 염두를 두지 않았지만, 이젠 느낌과 생각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혹시라도 휘발될까 메모로 그것들을 잡아 놓는데, 이게 어느덧 삶에 큰 즐거움이 되었다. 반복하여 메모하는 것, 메모를 반복하는 것. 소중한 나의 글쓰기 루틴이다.
더불어, 나는 글쓰기를 위해 책상 레이아웃을 바꿨다.
모니터는 와이드로 바꾸어 여러 창을 띄우고 자료를 참고해가며 글을 쓴다. 노트와 볼펜은 언제나 함께 두어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한다. 중저음이 안정적인 고음질 스피커를 두고 클래식을 틀어 놓는다. 클래식에는 문외한이지만, 언젠가 클래식을 들으며 글을 썼을 때 마음이 편했던 적이 있어 그것은 어느새 나의 글쓰기 루틴이 된 것이다.
우리는 때로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 의지가 생기길 기다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의지가 없어도 일단 시작하고 보면 의지가 생기는 경우를 많이들 경험한다. 일상 루틴이 그렇다. 반복되는 삶에 우리는 의지가 없어진다고 버릇처럼 말하지만, 단단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일상을 발판 삼아 무언가를 시작하면 힘찬 의지와 뜨거운 열정이 타오를 수 있다.
또 때론, 무언가 시작할 힘이 없을 때 일상 루틴은 그저 하던 대로 하라며 판에 박힌 듯 나를 모니터 앞에 앉힌다.
노트와 볼펜을 꺼내 들게 하고, 스피커의 볼륨을 높여 클래식 음악을 듣게 한다. 그러다 보면 나는 나도 모르는 어느새 글 한 줄 한 줄을 써 나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