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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24. 2020

코로나가 마스크 쓰고 갈 이야기

'희망'이란 단어가 있다는 걸 상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모든 문명의 기록은
또한 야만의 기록이다."


타노스의 핑거 플립.

킹스맨 빌런 밸런타인의 무료 유심카드.

다운 사이징의 인류 축소 프로젝트.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나를 소름 끼치게 한다.

다른 영화로 보이지만, 근간을 두는 핵심 메시지는 강력하게 교집합을 이루는데 그것은 '인간 혐오'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가이아 이론'에 따르면 지구 자체는 생물이며, 지구 상 생명체 하나하나를 세포로 규정한다. 그런데 지구가 아프다. 환경오염과 온실효과, 또 다른 생명체의 멸종. 문명이 발달할수록 주변은 망가진다. 문명은 곧 지구라는 생물에 대한 야만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쯤 되니 '인류문명은 암세포적 질병이다'란 공식이 성립된다. 그러니 환경이 오염되고 자원이 부족해지는 지구 상에서, 타노스의 핑거 플립은 절실한 것일 수 있다. 무료 유심카드로 인류의 폭력성을 증폭하여 서로 죽이게 만들려 했던 밸런타인의 의도도 이해되며, 다운 사이징을 통해 자원을 극대화하려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기꺼이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미 만연한
'혐오'라는 오염물질


'혐오'는 어디에서 오는가.

혐오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미 주위에 만연하다. 인류 역사는 또한 차별, 억압, 폭력으로 점철된 시간의 흐름이니까. 사람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말하지만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신념도, 결국 서로 죽이는 전쟁을 통해 깨달은 무엇이다. 대놓고 인종 차별을 하는 사람을 저급하게 보는 것도 또 다른 혐오이며, 폭력은 극히 악한 것이지만 공권력을 통해 정당화될 수도 있는 아이러니를 가졌다. 공장의 폐수만이 오염물질이 아니다. 앞뒤가 맞지 않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삐딱하게 볼 수밖에 없는 편협한 감정과 내로남불의 잘못된 신념은 그야말로 매스꺼운 오염물질이다.


그러나 인간은 '혐오'를 타고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개인적인 존재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신만의 영역을 갖는데, 그 영역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고 누군가 그 선을 넘을 때 '혐오'는 작동한다. 저 사람이 이 선을 넘어오면, 나는 휴지를 사용할 수 없을 거란 불안감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세계 뉴스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인류애'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위기의 순간에 인간은 서로를 혐오적 존재로 인식한다. 인류 개체수가 줄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이유다. 이처럼 혐오는 1차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기제로 그 역할을 하지만, 방어의 정도가 세지면 문제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반출생주의자'들이 그렇다. 그어놓은 선이 좁아지고 좁아져 스스로를 향하고, 이내 '자기혐오'에까지 이른다. 인류가 자손을 가져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왜 동의 없이 아이들을 태어나게 해서 이 세상의 고통을 맛보게 하다가 죽게 만드냐고 따진다. 그러면서, 인류를 한 방에 날려 보낼 수 있는, 지구 한쪽에 커다란 구멍을 내는 빨간 버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동의'없이 삶을 빼앗는다는 개념이므로 그들의 신념과 상충한다. '혐오'에 의해 오염되어 마비된 이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이러스 vs. 인간 혐오
코로나가 마스크 쓸 이야기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며 사람에 대한 혐오가 생겨났다.

인종과 국가, 지역과 단체를 가리지 않는. 나는 이것이 더 크고 위험한 오염물질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혐오는 꽤 익숙하다. 그저 또 하나의 혐오가 생겼을 뿐,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패턴이다.


꼰대. 극혐. ~충. 좌파, 우파. 빈자 혐오. 남성 혐오. 여성 혐오 단어 등.

차마 세세히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종류는 많고, 오염의 정도는 짙다. 바이러스의 등장이 무색할 만큼 더 큰 혐오의 물결이 몰아쳐오는데, 돌아보니 우리는 이미 혐오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있던 것이다.


그야말로, 코로나가 마스크 쓸 상황들이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 또한 그 오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그게 두렵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갈등, 내 선을 넘었다고 생각해 발사되는 분노, 나는 바이러스가 시작된 곳의 국민이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이중적 태도. 무언가 털어내려 하면 할수록 때가 묻고, 오염은 번지는 느낌이다. 


바이러스엔 백신이라도 있다.

인간 혐오엔 백신과 같은 약이 있을 수 있을까?




예전에 봤던 한 카툰이 생각난다.

세 컷짜리 그림이었는데, 인류가 멸망한 지구는 어떻게 될까란 첫 컷. 황폐한 거리의 두 번째 컷. 이내 초록색으로 자연과 녹음이 살아난 세 번째 컷. 인류는 정말 지구에게 질병과 같은 존재인 것일까?


그 어떤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바이러스도 무섭고, 인간 혐오는 더 무섭다. 더불어, 인간 혐오를 저버릴 수 없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무기력해진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어찌 되었건 '희망'이란 단어가 있다는 걸 상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 혐오를 없앨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줄여볼 요량이니까. 나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적어도, 우리가 마스크를 써야지, 바이러스가 우리를 피해 마스크를 쓰면 안 될 테니까 말이다.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선택!)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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