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Apr 03. 2020

직장에선 왜 인간적인 대접을 못 받을까?[Part.1]

대상화(對象化)의 양면성

426일


지상으로부터 75미터. 

세계 최장기 굴뚝 농성이라는 타이틀. 두 번의 긴 겨울을 보내고 나서야 두 노동자는 땅을 밟았다. 말 그대로 사투가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는 간혹 뉴스의 어느 중간에 소개되고는, 다시 잊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이 목숨을 걸고 힘겹게 고공에서 농성을 벌이는데, 왜 하루빨리 대화를 하거나 문제 해결을 하려 하지 않았을까란 의문이 자연스럽게 든다.


징역 15년 선고.

심야시간 가스배관을 타고 가정집에 침입해 잠자던 여성을 성폭행하고 10시간 동안 감금한 30대 남성이 1심에서 중형을 받았다. 피해자를 움직일 수 없도록 전선으로 양손으로 묶은 뒤, 감금한 채 생각조차 하기 힘든 범죄를 저질렀고 피해자는 극도의 공포감과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 이 범인은 사람의 탈을 쓴 인간일까, 아니면 사람의 탈을 벗어버린 인간일까.


입에 올릴 수도 없는 표현.

세월호의 아픔은 국민 모두의 것이었다. 모두가 아파할 때, 누군가는 찢어지는 유족들의 가슴을 아랑곳하지 않고 희생자들을 조롱했다. 그들을 먹는 것으로 비유하며 조롱한 그들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관심을 받기 위한 처절하고도 처량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사투'는 그러라고 있는 말이 아니지만.)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그들의 행동엔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위 세 가지 사례의 공통분모는 '대상화'다.

'대상화'로 빚어진 참극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대상화'를 사이에 두고 서로 '조우'한다. 하지만 그 '대상화'는 서로의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방적이다. 특히, '가해자'의 시선에서 '대상화'는 확립된다. '대상화', 즉 'Objectification'은 '사물화'로도 해석된다. '사물'은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대상이다. 숨이 붙어 있는 '생물'을 '사물화'하면, '생물' 본연의 가치는 오염된다. 존중받아 마땅한 인격보다는, '가해자'가 원하는 시각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된다. '가해자'가 자신의 목적이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서슬 퍼런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본다면, 먹잇감이 된 대상은 숨이 붙어 있던 그렇지 않던 상관이 없는 것이다.


첫 번째 사례에서, 고공 농성자를 바라본 사측의 시선은 그들을 '노동자'로 대상화했다.

(사측 고위 임원과 같이) 숨을 쉬고 밥을 먹는 사람으로 대접하거나 대립한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그들이 땅을 밟았을 시간이 더 단축되었어야 함이 마땅하다. 아마도 그저 서류 상에 표기된 정리해고자 1, 2 정도로 취급되었을 것이 뻔하다. 회사의 존립과 효율화를 위해서였다고 하겠지만. 마찬가지로,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례 모두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또는 관심을 끌기 위해 '가해자'는 '피해자'를 대상화했다. 끔찍한 일을 벌일 때, 숨 쉬는 고귀한 인격체가 느낄 공포와 수치는 본인의 목적 앞에서 바스러진 것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결국 그들은 '같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상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여실히 드러나고 구분된다.


마르셀 뒤샹의 '샘' (1917)

'변기의 미술관 난입사건'이라는 별칭이 붙은 '마르셀 뒤샹'의 작품은 '오브제(Object)'란 용어를, 그에 대한 의미를 분발시켰다. 예술가가 힘들여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지 않더라도,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개념)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현대 미술사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현대미술관에서도 재밌는 일이 있었다. 17세 소년과 그의 친구는 미술관 한쪽 바닥에 평범한 안경을 하나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사람들이 안경 앞에 모이고는 그것을 감상하거나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평범한 안경을 바라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바로, 그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대상화' 한 것이다.


즉, 사람은 '생물'이든 '사물'이든 그것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상화'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숨 쉬는 고귀한 인격체를 마구 짓밟기도 하고, 한낱 평범한 소변기나 안경 하나를 놓고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상화'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아니, '대상화'를 하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상대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과 생각을 '양면'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다. '대상화'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개념과 태도가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어쩌면 대상화를 하는 상대를 바라보는 관점을 더 좋은 쪽(?)으로 조절할 수 있지는 않을까라는 희망이 생긴다. '좋은 쪽(?)'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인데, '대상화'에 대한 이야기를 직장에 적용시켜보면 더 그렇다. 마냥 대상을 존중하거나, 마냥 어떠한 사물로 취급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때에 따라 그 두 가지 모두는 적절한 처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상화'에 대한 설명을 했으니, 이를 직장에 적용시켜보고 그렇다면 우리는 직장에서 왜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지 함께 살펴봤으면 한다.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선택!)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