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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pr 03. 2020

직장에선 왜 인간적인 대접을 못 받을까?[Part.2]

직장에선 '대상화'의 활용이 필요하다

신입사원 때였다.


점심시간, 사무실을 내려와 회사 뒷문으로 나가는 길은 언제나 붐볐다. 

뒷골목에 위치한 식당으로 향하느라 같은 시간 배고픈 직장인들은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막내로서 팀을 따라나서던 그때, 저 멀리 건물 유리에 비친 우리 팀 속에 속해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무리 안에서, 나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었다. 팀에 속한, 넥타이를 갑갑하게 목 끝까지 바짝 조이고 흰 와이셔츠 안에 갇힌 직장인이 아저씨였다. 학생 때는 점심시간이면 우르르 몰려 나가는 넥타이 부대 속에 내가 있을 거라곤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대상화'한 것이다.

각 존재의 개별성을 고려하지 않은 위압적인 시선은 나로부터 나에게로도 이른다. 나는 나를 흰색 와이셔츠에 갇힌 아저씨 직장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무기력해지고,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별로서의 나는 무너졌고, 그 무너진 곳을 짓밟고는 스스로 대상화한 어느 존재가 우뚝 서 있던 것이다. 직장인으로서 나는 가끔 '회의(懷疑)'한다. '직장인'으로서 갖는 애환과 어려움에, 개별로서의 나를 욱여넣는다. '직장인'은 월급이나 받아 꾸역꾸역 살아가는 존재로 규정하거나, 퇴사하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사회적 분위기에 동조한다. 이는 '직장인'은 주도적인 존재라는 것, 개개인의 역량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시선이라는 점에서 불편하고 불합리하다. '직장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은 그렇게 확고하고 단정적이며, 개별의 가치는 바스러진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스스로를 그 정도로 '대상화'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어떠할 것이며 직장이라는 조직은 또 어떠할 것이냐는 것이다.


직장은 '인간적인 대접'을 해주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직장은 '인간적인 대접'을 주고받는 곳이 아니다.

직장, 즉 회사와 나는 '계약관계'에 근간을 두고 있고, 우리가 일하는 상사나 동료 후배들도 모두 회사와 '계약'을 기반으로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다. '계약'이라는 제도는 '대상화'와 '대상화'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회사는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노동자는 일을 하고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집단이 필요한 것인데 이는 서로의 목적에 의한 만남이다. 'HR', 풀어쓰면 'Human Resource'다. 회사는 우리를 '자원'으로 '대상화'한다.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고 계약을 한 것이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 회사가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복리후생과 워라밸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이는 개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생산성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그러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으면, '자원'들은 회사를 나가거나 인재라 불리는 '자원'들이 오지 않는다.


나는 밤이고 새벽이고, 휴일이고를 가리지 않고 업무 지시를 받는다.

나에게 업무 시간 외에도 그렇게 업무 지시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나는 '대상화'가 된 것이다. 나는 휴일에 아이와 놀아주거나, 와이프와 사랑을 나눌 수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상사의 지시나 물음에 바로 대답해야 하는 '객체(자원)'인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일까? 상사는 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업무 지시를 해대고, 나는 그것을 꾸역꾸역 해내고 있는 것일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상사와 나는 회사와 계약, 즉 대상화가 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사 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 보니, 직장은 '인간적인 대접'이 우선이 아니라 업무나 성과가 우선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더불어, 회사에서는 이러한 부담을 줄이려 '직급'과 '직책'을 만들고 관리한다. 내가 팀장이라서, 내가 주재원이라서 시간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업무 지시를 받는 이유다. 지시하는 사람도 나를 한 개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팀장'으로 보는 것이고, 나도 업무 지시하는 사람을 굳이 나를 괴롭히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사'로 '대상화'한다.


직장에선 '대상화'의 활용이 필요하다


직장은 '인간적인 대접'을 해주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마음은 좀 더 편해진다.

그러니까 회사는 왜 나를 인간적으로 대접을 안 해주지란 생각을 하기보단, 그 상황을 인정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대상화'를 통해 인간적인 대접을 못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느꼈겠지만, 사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분명 누군가를 '대상화'하고 있다. 더불어, 그것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게 하거나 마음에 상처 준 일도 허다할 것이다. 직장 생활하면서 타 부서 사람이나, 주위 동료들과 갈등이 없을 수가 있을까? 그 갈등은 대개 '업무'나 그와 연관된 '태도'로부터 온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내가 상대방을 '대상화' 했는데, 그 수준으로 따라오지 못하는데서 야기된다. 연애를 할 때도,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이 잦아지는 것은 초기에 상대방을 나 바라보는 존재로 '대상화'를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가 상사가 되고 팀장이 되었을 경우 상대를 '대상화'하여 바라봐야 하는 경우도 있다.

개개인의 감정을 다 헤아리면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다시, 회사에 모인 사람들은 '대상화'가 되는 것에 대해 동의하고 계약한 사람들이며 그래서 '직급'과 '직책'이 있다.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업무 지시에도 기분 나빠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건, 일을 하는 한 나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업무를 주는 그 상사를 나는 또 '대상화'한다. 그는 그의 일을 하는 것일 뿐. 이처럼 '대상화'는 '감정'과 '업무'를 분리해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잘만 활용하면, 인간적인 대접을 못 받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에 달려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제거할 좋은 툴이 된다.




그럼에도 난, 업무와 별개로 직장 사람들을 '대상화'의 시선 말고도 '개별'로 보려 노력한다.

공동의 업무 성과가 났더라도, 그것은 개개인의 노력이 합쳐진 결과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칭찬을 해주거나 피드백을 주면 분위기는 좀 더 좋아진다. '대상화'가 된 존재들이 '계약'으로 모인 삭막한 직장 생활을, 조금은 더 유연하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를 '대상화'할 것이냐, '개별'로 접근할 것이냐는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가장 최악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 때 상대방을 '대상화'하는 것이고, '대상화'해야 할 때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 작동될 때, 우리는 맨 처음 앞서 말한 '가해자'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선택!)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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