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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22. 2020

글쓰기는 얼룩을 지워내는 위로다.

행복한 역설은 삶을 흥미롭게 하는 재주가 있다.

살다 보면 마음이 많이 상한다.

상한 마음은 인생을 슬프게 한다. 슬픈 인생은 개개인의 우주에 대한 평화가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아무리 햇살이 쨍쨍하게 비추어도, 나는 상관없는 것이다. 이미 내 우주에 드리워진 어둠에 한낱 저 하늘의 햇살은 개입을 하지 못한다.


마음의 상처는 마치 하얀 옷에 묻은 얼룩과 같다.

순백색의 하얀색이 오염되었을 때 우리는 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눈을 찡그린다. 당장 그것을 지워내려 하다가 그 얼룩은 더 넓게, 그리고 더 깊게 베인다. 그것은 슬픔의 깊이와 크기에 비례한다. 말 그대로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진다.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해선 슬픔을 어떻게든 가누어야 하는데,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술을 마시거나, 달달한 것을 먹거나. 무언가를 플렉스 하거나 여행을 가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깨닫는 건, 당장은 슬픔을 잊을 수 있겠지만 본원적인 상처나 슬픔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서는 마음의 얼룩을 좀 더 잘 다루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마음의 슬픔을 다루는 방법은 표면적이면서 그 중심엔 내가 없는 처방인데 글쓰기는 확연히 다르다. 글쓰기는 '시간'과 함께 하는 동시에 '나'라는 본질적인 위로의 대상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간다.

이 슬픔을 빨리 되감기 하거나 잊어버리기 위한 게 아니라, 한 땀 한 땀 그것을 되새기고 마주한다. 술로는 당장 잊을 수 있지만, 다음날 숙취와 함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더 큰 슬픔을 맞이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는 한 자 한 자 적어갈 때 시간과 함께 마음을 어루만진다.


더불어 글쓰기 그 중심엔 내가 있다.

쇼핑을 하며 무언가를 질러버린 그 중심엔 '돈'이 있다. 돈이 그 물건을 산 것이지, 어쩐지 나는 무언가에 홀렸던 정신을 차려 아까운 소비를 했다는 후회를 할 뿐이다. 돈이, 구입한 물건이 내 마음을 어찌해주리라는 것과 달리 글은 내가 적어 내려가는 것이므로, 그 한 자 한 자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슬픔의 주체인 나를 좀 더 진실되게 보듬을 수 있다.


결국, 글쓰기는 얼룩을 지워내는 위로다.

하얀 옷의 얼룩은 사실 지워지지 않는다. 그 농도를 옅게 할 뿐. 결국 우리는 그 옅어진 얼룩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글쓰기는 이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글쓰기는 그 얼룩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진실을 말해주고, 늘어 가는 얼룩들을 멋지게 받아들여 의미 있는 무늬를 만들어 준다.


그것이 글쓰기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이고, 순기능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글쓰기가 이러한 큰 선물을 주지만, 글을 쓰는 건 누구도 아닌 나라는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새롭다.


그것은 행복한 역설이다.

그리고, 행복한 역설은 삶을 흥미롭게 하는 재주가 있다.




스테르담 글쓰기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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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모음]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의지!)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지 못했던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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