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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24. 2020

직장인, OO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상처는 주고받는 것이다.

반복하는 존재에게
삶은 상처 투성이다!


직장인은 반복의 아이콘이다.

아침 알람이 울리면 그 반복은 시작된다. 시작된 반복은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지만 역시나 '반복'이란 굴레는 다르지 아니하게 굴러간다.


반복하는 존재에게 삶은 상처 투성이다.

그 상처는 영광의 상처와 지침의 상처 양면이다. 꾸역꾸역 출근해야 한다는 가련함은 지침의 상처지만, 꾸준하게 이어간 시간들은 그야말로 영광이다. 무언가를 이루거나 지켜내기 위해 반복하다 얻은 상처는 꽤 의미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처는 때론 흉터가 된다.

그것이 몸에 생기면 밴드로 가릴 텐데, 마음에 생기면 그것은 트라우마가 된다. 트라우마는 완치되지 않으며, 직장생활은 완치는커녕 또 다른 트라우마를 선물로 주기 바쁘다. 사람들과의 부대낌, 과중한 업무와 책임감, 내 책상의 유효기간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직장인은 고달프고 또 고달프다.


그러나,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그럼에도 우리는 또 일어나야 한다.

상처 받아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월급은 나오지 않는다. 월급이 인생의 전부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렇다고 말한다. 더불어, 직장인에게 있어 월급과 승진을 빼면 무엇이 남느냐고 묻고 싶다. 직장인의 월급은 만족할 정도로 많지가 않아서 그렇지, 그렇다고 가볍고 팔랑거리는 게 아니다. 거기엔, 노동력과 치환된 정당한 수고뿐만 아니라 밑도 끝도 없는 욕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포함되어 있다.


액수는 가벼워도, 의미는 묵직하다.


그러니, 직장인은 하루를 시작할 때 힘을 내어 일어나,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아가야 한다.


첫째, 출근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출근 자체가 용기여야 하는 날이 있다.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를 쓴 이유기도 하다. '출근 그게 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오만함을 알아야 한다. 과거에 분명 그런 적이 있었고, 없었다면 향후 어느 날 그러한 날이 분명 올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정도 되면 출근하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할 테니까.


어제 한 실수, 사람들과의 갈등.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 대는 내 모습 등.

상처투성이의 마음이더라도, 내 마음이 아무리 아파도. 직장인은 출근을 해야 한다. 몸과 마음을 달랠 방학도 없다. 그러니, 어차피 출근을 해야 한다면 당당히 가슴을 펴고 고개를 조금 더 들어 나가는 것이다.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출근하는 것이다.


둘째, 포용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직장생활의 가장 큰 상처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람으로부터다.

그런데, 언젠가 그 상처는 위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도 온다. 건성건성 대답하는 후배부터, 정당한 업무 요청(나는 '지시'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에도 하기 싫어 죽겠단 표정이 그대로 배어 나오는 후배. 좋게 말하면 만만하게 보고, 뭐라고 하면 꼰대라 정의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은 그야말로 씁쓸함이다.


그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때를 보아 복수하는 방법은 그리 좋지 않다.

그건 내가 해봐서 안다. 정말, 당장의 효과도 없고 중장기적 변화도 없다. 그저 내 기분만 상하고, 내 악담만 늘어갈 뿐이다. 결국에 나는 '포용'을 떠올렸다. '쌀' 포, '얼굴' 용. 얼굴부터, 표정부터 바꿔야 하는 고되고도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요즘은 '포용'하려 애쓴다. 그것이 나를 위한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셋째, 떨쳐내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직장내공'에서 '받아들임과 떨쳐버림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무언가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우선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나에 대한 험담 일 수도 있고, 잘못 인식된 이미지일 수 있으며 나에게 그저 주어진 스트레스일 수도 있다. 받아들이는 과정을 건너뛰면, 그것은 떨쳐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받아들인다는 건 그리 쉽지 않다.

받아들인다는 건,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것으로 다가 오기 때문이다. 나는 아니라고 발버둥 쳐보지만 사실 그건 별로 쓸모가 없는 발악이다. 누군가 나의 악담을 했다면, 그것은 이미 실체다. 내가 발버둥 친다고 사라질 것의 성격이 아닌 것이다. 억울함은 나 자신만을 힘들게 할 뿐.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받아들여보면 생각보다 마음이 편해진다.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여 보면 말이다.


그제야, 우리는 나와 상관없다며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이다.




'상처를 받는다'란 말은 흔하다.

그런데, '상처를 준다'는 표현은 자신에게 있어 그리 흔한 말이 아니다. 둘 중 어느 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지 곰곰이 돌아보자.


사실, 상처는 주고받는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큰 상처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크게 아픈 법이다. 그러니 내가 받은 상처만 보일 뿐, 내가 준 상처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피가 철철 나는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도 말이다.


세상에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만약 있다면, 다른 이의 상처를 이해할 수도 없다.


상처 받지 않은 '것. 처. 럼'이란 말은 상처는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며, 동시에 상처에 대한 아픔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 아픔을 잊지 않고, 다른 이에게 아픔을 주지 않으려 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매일을 출근하고 포용하며 떨쳐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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