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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n 17. 2020

날카로운 말에 베었을 때

그 날카로움에 나는 무언가를 보태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여섯 살 때쯤으로 기억한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때 조금 이상한 버릇이 있다. 부모님 몰래 칼로 어느 모서리 부분을 비스듬히 베어내곤 했었다. 예를 들어 나무로 된 바둑판의 끝머리를 사각사각 베어내곤 했는데, 그 소리와 잘라져 나가는 모습이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준 것이다.


러던 어느 날.

그러다 손을 베었다. 꽤 깊숙이 베인 손가락을 보고 그저 멍하니 있다가 피가 나오는 것을 보고 펑펑 운 적이 있다. 피가 보이지 않을 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늠이 안되었었는데, 피가 나오니 사태 파악이 된 것이다. 놀라서 달려온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일까. 어디를 다치거나 상처가 나면 피가 나오는지 아닌지부터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아마 이 버릇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습성일 수 있다.


살다 보면 이렇게 어딘가에 치이고 베이는 경우가 있는데, 물리적인 마찰이 없어도 이러한 일은 일어 난다.

특히, 상대방의 말에 가시나 칼날이 있으면 여지없이 우리의 마음은 찔리고 베인다. 쓰라리고 쓰라린 그 고통에 우리는 몸서리친다. 그 베인 마음의 틈새로 많은 것들이 흘러넘친다. 자존감이나 자존심, 희망과 용기 등이 정말이지 콸콸 흘러나온다. 나는 그것을 '마음의 피'로 정의한다.

살아 있는 베인 존재는 피를 흘린다. 마음은 살아있으므로 그렇게 피를 흘리는 것이다.


어른이 되었어도 우리는 피를 보면 놀란다.

그건 사람의 본능이므로, 겁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본능은 사람을 방어적으로 만들고,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먼저 남에게 날카로운 말을 던지는 가련한 존재로 변화시킨다. 내 기억을 되돌아보면, 누군가의 날카로운 말에 베었을 때 흘리는 피를 지혈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날카롭게 내 칼을 갈곤 했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면 더 큰 칼이 내 마음에 더 큰 생채기를 내었으며, 때로는 내 칼에 내가 베이는 일도 있었음을 깨닫는다.


날카로운 말에 베었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또 다른 칼을 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지혈해야 한다. 쏟아져 나가는 많은 것들을 최소화하고, 내 마음을 스스로 어르고 달래야 한다. 빨간약도 발라주고, 반창고도 붙여 줘야 한다. 그렇게 잘 관리하다 보면, 어느새 아무리 날카로운 말이 내 마음에 와 닿아도 그것은 뭉툭한 면과 선 이상의 것이 아니게 된다.

상대방의 칼을 내가 갈아 주고, 스스로 더 깊게 베이는 우를 줄일 수 있는 것이다.


말에는 가시나 날카로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 가시와 날카로움을 최소화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날아든 날카로움보다, 내 마음에 더 집중을 해야 하는 이유다.

그 날카로움에 나는 무언가를 보태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피를 보고 울던 소년은,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원하지 않는 상처들을 무수히 겪고 난 후에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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