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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an 27. 2016

일상다반사

받아들임의 연속 그럴  수밖에 없는 연속

늘 그러하다.

상대는 상대방의 틀에서 생각하고 말을 내뱉는다.

상대방의 상대방이 된 나는 좀처럼 그 틀을 비집고 나온 생각과 말이 소화가 되지 않는다.

나의 틀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보다 높은 사람이라면 시간이 없다.

상대방의 말과 생각을 억지로 내 틀에 맞춰보거나, 아니면 내 틀의 모양을 바꾸어보려는데 이게 쉽지 않다.

아마, 그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쉽게 해내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신'이라 부르겠다.


받아들여본다.

왜 상대방의 머리에서, 입에서 그러한 생각과 말이 나오는지를.

잠시 나 자신을 접어두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틀을 가지고 받아들여본다.

그리고 상대방의 눈으로 상대방인 나 자신을 살펴본다.


언뜻 이해가 되기도 하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문제는 상대방도 상대방인 나의 입장을 고려하고 생각과 말을 뱉었느냐이다.


애초부터 그런 걸 기대하지 말자.

그저 내가 상대방과 입장을 바꾸어 보았다는 것에 스스로 기특해 하자.


받아들임은 때로는 미학이고, 때로는 고통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맘 편하고 일을 그르칠 확률이 낮은 건 사실이지만 너무 일방적인 받아들임은 자신을 서서히 무기력하게 만드는 종양과도 같다.


방법은 있다.

받아들이는 나를 한 발짝 뒤에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

그리고 분노와 미움과 기쁨과 애정과 사랑과 이별과 서러움과 슬픔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받아들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길이 보이고, 다음이 보이고 상대방보다 더 큰 틀을 가지게 된다.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대신 받아들이는 자신을 받아들이며 기특해 하자.


그러다 보면, 어제와 나는  다름없을지 모르나 몇 개월 전의 나와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어제와 오늘의 손톱 길이는 차이가 없지만, 한 달 전 그것과는 자르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의 차이인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일상에서 조금씩 자라고 있다.

그러니 스스로를 기특해하자.


내가 알아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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