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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Feb 03. 2016

행복은 경험일까, 기억일까?

덜 불행해지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운명 속에서

어제였다.

여느 때보다 일찍 퇴근한 저녁 7시 30분.

가족과 함께 였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나를 위해 와이프는 식사 준비를 하고,

귀여운 아이들은 각자의 장난감 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첫째 녀석은 나를 위해 그동안 배운 피아노를 연주해주기도 했다.


어렸을 적 아버님 없이 자란 나에게,

이러한 정겨운 가족의 풍경은 완벽한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고 바라마지 않았던 모습.


그런데 기억을 해보면 그리 행복하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돌이켜 보건대, 사무실에 두고 온 해결되지 않은 업무, 그리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나 하는 이유모를 뒤쳐짐에 대한 두려움, 자기계발을 위한 영어공부나 아니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운동을 해야 하는 건 아닌지에 대한 복잡한 생각이 나를 괴롭혔던 것이 분명하다.


난 분명, 행복을 경험했으나 행복하다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 사람이라는 운명"


한국 사람인 우리는, 아니 나는 행복할 일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행복을 경험하고 행복을 못 느끼는 걸까?

일찍 퇴근해서 가족들과 보내는 그토록 바라던 시간이, 행복하게 기억되지 못하는 건 어쩌면 한국 사람인 나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몇 년간 해외(행복이 만연하다는 유럽)에 머물며 일을 하는 상황인데, 그러한 불편한 마음이 떨쳐지지 않은 걸 보면 과연 운명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서글프지만. 지긋지긋한 현실.


생각해보면 한국 사람의 삶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덜 불행해지기 위해 살고 있는 듯하다.

바꿔 말하면, 승자가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양새다.


더 이상 성장의 시대가 아닌 이 마당에, 가진 자는 더 가지려 혈안이고 중산층은 그 지위를 잃을까 하루하루 치열하고, 없는 자는 계속 그래 왔듯이 매일이 고달프다. 생각해보면 지난 성장의 시대에도 우리 어르신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성장의 열매를 즐길 겨를도 없이 고달프고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한국사람은 '행복'을 느낄 겨를이 없고, 그런 것에 서투르며, 운명이려니 받아들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행복하자 우리! 근데 '행복'이 뭐지?


어쩌면 어느 한 가수가 '행복'을 정의한 걸지도 모른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우리. 아프지 말고"


그렇다.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은 행복의 가장 우선적인 조건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건강하면 그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건강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에 대한 질문이자 대답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 (幸福) [행ː복]
[명사]
1. 복된 좋은 운수.
2.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


아니, 따분한(?) 사전적 의미 이런 거 말고.

나의 행복은 무엇인가? 여러분의 행복은 무엇인가?


행복은 정말 극명하게 상대적이다. 누구나가 알듯이.

나에겐  맛없는 빵 한 조각이 3일 동안 굶은 사람에게는 큰 행복일 수 있으며, 업무와 야근에 지친 직장 생활은 취업이 간절한 사람에게는 간절한 행복일 수 있다.


그럼 빵 한 조각에서 맛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업무와 야근에 지친 직장인은?

그들에게는 무엇이 행복일까?

그들에게도 무언가 상대적인 '행복'이 이 분명 있을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자기계발서 들은 말한다.

행복할 것을 선택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행복은 여러분 주변에 있다. 등등.


말이 쉽지.

책을 접고 나서, 그렇게 행동하고 생각해서 솔직하게 행복해진 적이 있을까?

오히려 행복하다는 생각을 못하면, 난 왜 행복을  선택하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멍청이일까란 자책감이 들 정도다.


결국, 우리는 행복해지길 바라지만 '행복'이 뭔지는 모른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나는 행복을 경험하고서도 그랬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어쩌면 나는 그동안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행복을 느낄 겨를도 없고, 행복을 경험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나에게 던지는 상처가 될 돌과 같이.

행복함을 느끼기 위해서도 깜냥이 필요할 줄이야.


행복은 의무가 아니지만 어느새 의무적인 요소가 되었는지 모른다. 행복하지 못하면 왠지 모르게 '안 되는' 모양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아무 일이 없을 수도 바빠 힘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희로애락의 가운데에 '행복'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울면서도 행복할 수 있고, 불행함 속에서 행복한 사람들도 분명 있고, 바쁨 속에서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듯이.


그런 관점에서 난 혜민스님의 '받아들임'을 떠올려 본다.

기뻐하는 나를, 슬퍼하는 나를 그저 '받아들여' 보는 것. 화나는 내 모습에 화내지 말고, 왜 화가 났는지, 화난 내 모습은 어떠한지 그저 '받아들여 보는 것'.


행복을 느끼는지, 불행하다고 느끼는지.

그저 그 순간을 받아들여 보는 것.


이러고 보니, '행복'이 무엇인지 정의할 필요가 있겠나 싶다.


행복해지기 위해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겠다는 이 몹쓸 목표지향적 습관이란.


"행복은 경험일까? 기억일까?"


돌고 도는 주절거림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우리는 하루에도 많은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느끼고 기억한다.


경험은 곧 '일어난 일'의 다른 말일 수 있다. 그 '일어난 일'이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누군가에게는 불행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 '일어난 일'을 행복하게 기억하느냐, 아니면 불행하게 기억하느냐는 각자의 몫일 수 있다.


어라.

여느 자기계발서에서 볼 수 있는 어쩌면 가식적인 명제가  도출되고 말았다.

결국, 행복은 각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하지만, 난 여기에 몇 가지를 나에게 덧붙이고 싶다.


행복을 정의하지 말고 그저 그대로 느껴보는 것.

행복을 이미 느끼거나 경험하진 않았는지, 지나간 것들에 대한 기억을 되새겨 보는 것.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은 무엇인지 돌아보는 것. 그리고 느끼고 기억하는 것.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받아들여 보는 것.

의무적으로 행복해질 필요는 없다는 것.


이렇게 글을 쓰긴 하지만, 난 분명 같은 고민을 내일 또 반복할 것이다.

내 장담한다. 운명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게 떨쳐지지는 않을 터.


그리고 행복을 선택하고, 정의하고, 바로  찾아내고,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면.

나는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나는 그저, 사람답게 (행복하게)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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