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 인생은 내가 '운(運)'전해가는 것이므로.
꽉 막힌 도로에서
인생을 돌아보다!
막혀도 이리 막힐 수 있을까.
강남 한복판에 차를 몰고 나온 나 자신을 탓하고 또 탓했다. 그렇게 도로 한복판에서 나는 인생전반의 '희로애락'을 맛봤다. 초록색 신호 하나에 기쁘고, 끼어든 차에 분노하고, 초보 운전자에겐 동정을, 뻥 뚫린 길에선 운전의 즐거움을 느끼며.
그러다, 교통 체증에 집중하지 말고 내 마음을 돌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도로 위에서, 희로애락을 반복하기란 스스로를 못살게 구는 가혹행위와 다름없기 때문에.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마음의 평안을 찾자고,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나는 다짐한 것이다.
그렇게, 운전을 하며 나는 인생을 읽어 내려갔다.
운전의 인문학,
운전을 통해 바라본 인생
가만 생각해보니, 그렇게 운전은 인생을 닮았고 인생은 삶을 운전하는 것과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운전(運轉)'의 '운(運)'자가,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행운'의 '운'자임을 보면 내 인생은 내가 몰고 있는 게 확실하다. 그러니까, 어떤 길을 가더라도 어떤 교통 상황이 오더라도 스스로를 탓하지 말고 운전에 집중하고, 주위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니 운전하는 모든 행위와 상황들이 인생의 순간순간과 딱 들어맞는다.
첫 운전의 그때를 잊지 못한다.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는 문명의 이기 안에서, 신나게 드라이브를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 갈 생각에 한껏 기분이 들떠있던 그때. 그러나, 그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나는 치러야 하는 게 그토록 많다는 걸 깨달았다. 차 값, 기름 값, 보험료, 정비/ 세차/ 톨비/ 세금 등. 더불어 맞이해야 하는 도로 위의 교통체증과, 상식 이하로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과의 실랑이까지.
삶엔, 생각보다 많은 책임이 도사리고 있다.
운전을 하다 보면 상식 밖의 차들을 마주한다.
분명 방향지시등이 고장 났다고 판단되는 '노깜빡이'차는 기본이고, 한 밤에 모든 전조등을 끄고 달리는 스텔스 차까지. 조금이라도 공간이 보이면 이리 끼고 저리 끼는 총알 운전에, 위험천만한 음주운전을 하는 차들도 있다. 이런 차들을 마주하지 않고 운전을 했으면 좋겠지만, 그건 내 맘대로 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일은 우리네 인간관계를 닮았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사회생활에서 심지어는 가족까지. 우리는 살아가며 만나는 사람들을 골라내거나 내 맘대로 정할 수가 없다.
차는 결국 사람이 운전한다.
사고는 사람과 사람의 충돌인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과의 갈등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를 휙 하고 지나가는 차를 보며 혀를 끌끌 찬다.
'저러다 사고 나면 어쩌려고...'
나보다 느리게 가는 차를 보며 답답함에 쏜살 같이 앞질러 나간다.
'왜 운전을 저렇게 하는 거야? 정말 답답하네!'
우리는 이처럼, 삶에 있어 너무나도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있다.
삶에 있어 나를 중심에 두어야 하는 건 맞지만, 나에게만 쏠린 운동장은 있을 수 없다. 내가 보는 나, 남이 보는 나를 겸허히 살펴봐야 한다. 나는 언제나 맞고, 내 기준이 항상 옳다는 생각을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하며 살고 있다.
도로 위의 차들은 모두 목적지가 있다.
목적지가 없는 차들은 없다. 장소를 정하지 않고 드라이브를 나온 차도, 언젠간 집을 향한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삶의 목적지가 있다.
그것은 각자가 정한 삶의 방향일 수도 있고, 추구하는 신념일 수도, 공통적으로는 죽음일 수 있다.
그렇다면,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내 목적지는 어디일까? 내 삶의 내비게이션은 나에게 어디로 가라고 하고 있는가?
각각의 차들은 목적지가 있다.
그러나 그 목적지는 다르다. 그 다름의 얽히고설킴은 갈등을 일으킨다. 내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차, 계속해서 걸리적거리는 차.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나를 빨간 불에 남겨 놓고, 혼자 쌩하고 달려 나가는 앞 차.
나를 방해하는 차들은 도로에 널렸다.
그러나, 그 차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일 뿐. 각자의 길을 가다가 의도치 않은 방해를 주고받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까, 오늘 나에게 피해를 줬던 어느 한 사람을 떠올릴 때 그 사람은 그것을 의도했다기 보단, 그 사람이 가는 길목에 내가 있던 것일 수 있고 반대로 내가 가고자 하는 길과 우연히 겹쳐 갈등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삶에 있어서 적은,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이가 된다.
나를 가로막는 건, 다른 차뿐만이 아니다.
사사건건 걸리는 빨간 불 앞에 나는 분노한다. 가뜩이나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땐,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다. 야속해도 이렇게 야속할 수 있을까. 세상은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 빨리 나오지 않은 내가, 빨간 불이 켜지는 그 순간에 그곳에 있는 내가 잘못한 것이다.
그러나, 신호등은 언젠간 바뀐다.
유독 내게만 길게 느껴지는 내 앞의 빨간 불도 정해진 시간 안에 바뀌게 되어 있고, 내가 가고 싶지 않아도 녹색불은 들어오게 되어 있다.
마치 신호등이 바뀌지 않을 것같이 분노하고 조급해하는 건 내 삶에, 영혼에, 건강에 적신호를 켤 뿐이다.
운전을 할 때 내겐 빨간불이 보행할 땐 초록불이다.
보행할 땐 초록불이 운전할 땐 빨간 불이다. 사람은 간사해서, 운전할 때와 보행할 때 초록불이 켜지는 시간이 단축되길 바란다. 그 둘의 단축은 상충이자 패러독스다.
더불어, 내 신호와 네 신호는 다르다.
나와 같이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같은 신호를 보지만, 보행자라면 반대의 신호를 본다. 보행자에게 왜 너는 나와 반대로 신호를 보고 있냐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상대방에게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말을 퍼붓곤 한다.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상대의 신호는 무조건 내 것과 같다고 생각해 내뜻대로만 하려는 고집과 아집.
상대는 보행자의 신호를 보고 있는지, 운전자의 신호를 보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신호를 보고 있는지를 봐가며 살아야 한다.
왜 내 차선만 이리 막힐까.
옆 차선으로 핸들을 돌린다. 뒷 차의 눈치를 뚫고 어렵게 차선 변경을 한다. 성공했다는 안도의 마음도 잠시. 내가 떠나온 차선의 속도가 빨라진다. 이젠, 눈치가 보여서 다시 그리로 가지 못하겠다는 찰나, 그 차선에서 내 뒤에 있던 여러 차들이 나를 앞질러 나간다.
우리네 삶은 언제나 그렇다.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남의 삶이 쉬워 보인다. 내 인생은 지루한 롱테이크 컷이지만, 남의 인생은 재밌는 편집본이자 예고편이다.
말 그대로, 도로 위에서 사고가 났다면 쌍방 과실이다.
물론, 요즘엔 과실 체계를 손봐서 100% 과실도 나오는 추세다. 그러나 여전히, 쌍방과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은 양보를 하려 하지 않거나, 전방 주의를 하지 않을 때 사고는 일어난다.
상대방이 아무리 몰상식한 운전자라 해도, 어쨌든 사고가 났다면 나는 엮이고 만 것이다. 억울해도, 그 차가 90% 이상 잘못했다 하더라도 이미 결론은 '쌍방과실'인 것이다.
사람과 사람 간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갈등'은 두 사람 사이에서 튀는 불꽃인데, 이 또한 '쌍방과실'이다. 나는 억울하다고 말하겠지만 양보를 하지 않으려던 마음. 내가 맞다는 일방적인 마음.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전방 부주의가 바로 쌍방과실의 증거다.
나는 그저 내 갈길을 가고 있었는데.
뒤에서 3대의 차가 나를 연달아 충돌한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운전은 이처럼, 나 하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아무리 내가 운전을 제대로 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달려와 박으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방어운전이 필요하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방어운전은 마지막까지 내가 쥐고 있어야 할 최선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나 하나만 잘 살면 될 것 같지만, 어처구니없이 나를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르는 사람일 수도, 친한 친구일 수도 심지어는 가족일 수도 있다.
'방어운전'처럼 '방어인생'이 필요하다.
물론, 내 갈길 가다 뒤에서 받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방어운전하며 인생을 몰아가야 한다.
내가 나를 지키는 것엔, 과함이 없다.
이 밖에도, 차에 탄 사람은 차 껍데기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있다.
스포츠카를 탄 사람은 도로를 경주트랙으로 보고, 값비싼 외제차를 탄 사람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며, 오래되고 낡은 차를 타는 사람들 중엔 자격지심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대형차와 소형차가 신호 앞에서 출발하지 않을 때 뒤차가 경적을 울리기까지의 시간을 측정한 실험이 있었는데 예상대로 소형차가 훨씬 빨리 시끄러운 경적을 받고 말았다.
삶에 있어서도 페르소나는 삶의 역할이라는 껍데기이며, 우리는 그 껍데기에 사로잡혀 그에 맞게 행동하고 말한다. 하지만, 껍데기의 무게는 자동차와 같이 무거워서 함부로 벗어던져 버리거나 쉽사리 바꿀 수 없다.
언제 어디가 막히고, 언제 어디서 사고가 날지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무지함과 불안함.
내가 통제할 수 없지만 막히고 뚫리는 과정에서 '운'을 운운하는 것까지.
앞서 말한 대로, '운전'은 '인생'을 닮았고 '인생'은 '운전'에 빗대어도 손색이 없다.
요즘은 오토파일럿이란 자율주행 기능이 핫하다.
레벨을 나누어 그 완성도를 가늠하는데, 분명한 건 아무리 기술이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사고가 났을 때 그 책임은 운전석에 있는 사람에게 귀속될 것이란 것이다.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운(運)'전해가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