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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23. 2020

'염증'의 인문학

'염증'은 우리에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삶을 돌아보라 말한다.

염증(炎症)

생체 조직이 손상을 입었을 때 체내에서 일어나는 방어적인 행동

- 어학 사전 -


발목이 시큰 거리더니 갑자기 퉁퉁 부어 걸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당황하던 차에, 그 고통이 '통풍 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통풍이 어떠한 것이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아질 수 있는지 찾아보았다.


원인은 식습관이었다.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는 식습관이 과다한 단백질과 지방을 축적하게 하고는 퓨린을 생성하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퓨린이 요산으로 남아 관절을 공격한 것이다.


'염증'이 주는 메시지
-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삶 -


그러니까, '염증'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염증'은 우리에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삶을 돌아보라 말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살고 있단 생각을 잘 하지 못한다.

익숙한 것에 매몰되는 습성과 내 삶이 맞다는 거만함에서 오는 특성이다.


'생존을 위한 통찰 인문학'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바로 '균형'이다.

균형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시도이자 의지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거만한 우리는 그 메시지를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염증'이 '고통'을 수반하는 이유다. 내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식습관을 계속 유지하고, 건강이 나빠지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그 삶의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간다면 어떨까.


생체 조직인 내 몸은 이러한 손상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생존하기 위해 방어적인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 방어 과정에서 '고통'이 유발된다. 만약, 우리 신체 일부가 불에 닿았는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재빨리 피하지 못해 심각한 화상을 입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고통'은 그저 나쁜 것이 아닐 수 있다.

'염증'이 주는 신호, 그 '고통'에 귀 기울이면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와
사람에 대한 염증


영화 '어벤저스'를 두고, 나는 그것을 그저 '블록버스터'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 어떤 영화보다 '인문학'적 요소가 가득하다고 나는 믿는다.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타노스의 핑커 플립' 때문이다.


나는 타노스가 우주 전체 생명체의 반을 날려 버리자고 했을 때, 영국 고전학파 경제학자인 '토마스 로버트 맬서스'의 '인구론'을 떠올렸다. 맬서스는 논리적 연역법을 통해 '인구 과잉'을 예측했고,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면 어느 시점부터는 식량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인구수가 식량의 양을 초과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러나,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기술진보의 위력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고 실제로 지금 우리의 삶은 맬서스가 걱정한 심각함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영화 '다운사이징', '킹스맨'은 물론 연이어 나오는 좀비 영화를 보면 나는 다시 미래를 걱정한다.

실제로 몇 년 전, '바이오사이언스'지에는 이러한 인구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논문이 올라왔고, 184개국 1만 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그 호소에 동참했다.


식량과 환경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했을 때 방어 가능한 적정 인구수는 약 80억 명 수준이다.

현재 인구수는 '20년 현재 약 78억 명이다. 깨끗한 물 보유량, 전체 삼림, 척추동물 수가 줄어들고 있고, 죽음의 해역과 이산화탄소 방출량 그리고 기온과 인구수만 증가를 하고 있다.


사실, 과학적인 그리고 환경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나는 인구수에 대한 진정한 걱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염증'이라 말한다.

그 '염증'은 '갈등'이라는 말로 풀이할 수도 있다. 지난가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출렁다리에 간 적이 있었는데 출렁다리 하나를 건너기 위해 1시간을 넘게 기다린 그 날. 나는 사람에 대한 '염증'을 느꼈다.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싫었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은 사라졌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던 것이다. 같은 사람이면서 인간인 내가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타노스와 다른 게 무엇인가?

'다운사이징'이란 영화에서는 사람의 크기를 줄여 자원의 효용을 높이자는 메시지가, '킹스맨'에서는 사람의 분노를 조절해 서로를 죽이도록 만들어 개체수를 줄이겠다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다. 더불어, 무수히도 나오는 좀비들의 모습은 떼 지어 서로를 물고 뜯고 하는 우리네 군상과 다를 게 없다.


'염증'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체를 벗어난 보이지 않는 염증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염증'은 신체뿐 아니라
마음과 관계, 생각에도 생겨 난다.


'갈등'과 '혐오'.

사람과 사람,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오는 '염증'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전쟁이나 인종차별, 계급과 계급의 충돌은 물론 일상적인 갑질로도 변화하여 우리 앞에 나타난다.


즉, 너와 나.

그리고 우리나라가 아닌 너희 나라. 왼쪽이 아닌 오른쪽. 진보가 아닌 보수. 젊은이와 노인. 남자와 여자라는 양극단으로 치우친 삶들에서 '염증'이 생겨나고 그 '염증'은 우리에게 '고통'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생각이 생겨나고, 다양한 욕구와 행동이 발생한다.

맬서스가 걱정했어야 하는 건, 식량의 부족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다양성'이다. 이기적인 존재인 사람이 각자의 다양성을 추구하면, 주체할 수 없는 여러 방향으로 치우치게 되고 '염증'과 '고통'은 다양해지고 강해진다.


그 모든 걸 한 방향으로, 한쪽으로 주워 담을 수 없다.

한두 방향이 아니라, 다양성으로 인해 사방팔방으로 뻗쳐 가는 그 욕망 속에서 오히려 '배려'와 '이해'라는 단어는 옅어진다.


단순히 인구가 증가되고 식량이나 자원이 모자랄 것이라는 맬서스의 이론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인구'의 과잉과, '식량'의 부족을. '욕구/욕심'의 과잉과, '이해/배려'의 부족으로 치환하면 나는 마침내 맬서스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소름을 돋아 올린다.


그래서 난, '개인주의의 확대', '경제 문제로 인한 결혼과 출산율 저하', '팬데믹 발생' 등을 이 '염증'에 대처하는 인간의 자구책이라 생각한다.

너무 깊숙한 타인의 개입을 불편해함으로써 (개인주의를 표방하며) 그 염증을 줄여 나가고,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가며 인구수를 조절해 나가는 것. 팬데믹의 발생도 그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팬데믹보다 더 무서운 '인간 혐오'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더 바꾸어 나갈지 마음이 편치 않다.


다시, '염증'이 주는
메시지를 읽어야 할 때


통풍엔 알칼리성 음식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입에도 안 대던 미역과 다시마를 먹기 시작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내 입맛을, 억지로라도 다른 한쪽으로 무게를 주어야 하는 때다. 그래야 한쪽으로 치우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고, 마침내 균형에 가까워질 수 있다. 하루 이틀로는 회복이 어렵지만, 적어도 어느 다른 쪽에 신경을 써야 할지에 대한 감은 잡은 것이다.


그러니까, 삶에 있어서 몸이든 마음이든 그 어떤 '염증'을 마주했다면.

그리고 그것에서 어떤 '고통'을 마주하고 있다면, 그것에 아파만 하거나 우울해하지 말고 '염증'과 '고통'이 주는 메시지를 봐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어느 쪽인가.


'염증'이 발생한 이유.

그것으로부터 오는 '고통'.


그 자체가 바로, '생존을 위한 통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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