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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23. 2020

회사의 크기가 나의 크기는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평생 책임져 주는 것

신입사원 때였다.

재킷 왼쪽 가슴에 빛나는 배지의 화려한 기운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가진 게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취업이 지금 못지않게 쉽지 않은 시대였으므로.

나는 그 기운에 취해있었고 들떠 있었다.


그렇게 뭔지 모를 기운에 휘청이며 집으로 향하던 전철 안.

갑자기 앞에 앉아 계시던 어떤 아저씨가 내 손을 툭툭 쳤다. 그리고는 턱으로 내 아래쪽을 슬쩍 가리켰다. 


아, 이런. 바지 지퍼가 열려 있었다.


그것을 알려준 분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나는 황급히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이 경험담을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의 '자부심'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회사는 나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다.
내가 가진 역량을 펼칠 수 있는 무대를 주었고, 대출 창구에 들이 밀 수 있는 명함을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어딘가로 갈 곳이 있다는 묘한 긴장감, 무언가에 기여할 수 있다는 효용감.

[중략]

하지만, 직장이 나에게 이렇게 많은 기회를 주었더라도 자부심은 그곳에서 오면 안 된다.
자부심은 말 그대로 나에게서 와야 한다.

남을 통해 내 꿈을 꾸면 안 되듯이, 자부심도 나에게서 나와야 한다.
회사 배지가 가슴에서 빛나고 있음을 의식하기보단 내 바지 지퍼를 먼저 단속해야 한다.

-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자부심' 中/ 스테르담 저, 다른상상 -


회사의 크기가
나의 크기는 아니다!


나는 확실히, 회사의 크기에 그리고 그 이름에 취해있던 게 분명하다.

자부심을 거기에서 찾았다는 건, 회사에 기대었다는 이야기다. 내 존재 자체를 회사에 빙의했던 것이고, 나를 지우고서라도 그것의 크기에 편승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러나, 그 지퍼 사건이 있은 후로 나의 숙취는 사라졌다.

자부심은 내 안에서 나와야 하며, 그래야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회사의 주가에 따라 내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해서도 안되고, 회사의 브랜드 평판이 내 삶의 질을 좌우해선 안된다.


오히려, 나 스스로의 자부심으로 일을 하고 성과를 내어 회사의 성장과 나의 성장을 함께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


'직업'이 아닌 '업'에 집중하기


이처럼, 회사의 이름이나 크기에 취하지 않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나의 '업(業)'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젠, 평생직장의 시대가 아니다.

은퇴까지 안정적으로 나를 보장해주던 시대엔, 평생직업이란 말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시대에 우리가 재정의 해야 하는 것은 '직업'이 아닌 '업'이다.


나의 '직업'이 '회사원'이라면, '업'은 내가 하는 '일'이다.

굳이 말하자면, '나'라는 사람에게 더 가까운 건 '직업'이 아니라 '업'인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평생 책임져 주는 것이지, 내 직장의 크기나 타이틀이 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나는 그냥 회사원이고, 출근해서 하는 일이라곤 엑셀과 파워포인트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은지.

의미 없는 회의의 연속에 회의(懷疑)하고, 윗사람의 입맛에 이것저것 맞추다 하루가 간다고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 내리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회사의 이름과 크기 또는 복리후생으로 그나마 스스로를 위로하는 건 아닌지.


'업'에 집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회사의 크기가 크든, 작든.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러하지 않은 부분에서 오는 허탈함과, 작다고 주눅 들어 맞이 하는 초라함. 그러하기에 더욱더 회사의 크기고부터 벗어난 생각을 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자부심을 끄집어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고, 나의 '업'은 뭘까?

누구는 한숨을 쉬며 '벽돌이나 쌓고 있다'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힘들지만 스스로를 격려하며 '집을 짓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 둘의 차이는 그야말로 크다.

나는 지퍼 사건 전후로 그 차이를 나눈다. 


회사가 나를 책임져 줄 것이라 생각했던 때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벽돌을 쌓고 있었지만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집을 짓고 있다고 생각하며 일한다. 언젠가, 회사원이란 타이틀을 놓아야 할 때가 분명 있다. 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때. 그때 나의 '회사원'이라는 '직업'은 사라진다. 그것에만 기댄다면 나의 미래는 밝지 않다.

그러나, '업'을 살려 나의 앞길을 걸어 나간다면 반대로 어둡지 않은 앞 날을 기대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내 '일'의 의미. 내 '업'의 이미. 그것이 곧 나의 '업보'가 될 것이기에.




내 직업은 나의 가장 두꺼운 페르소나와 관련 있다.

내 가장 두꺼운 가면은 먹고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가장 크지만 더불어 가장 큰 깨달음과 배움도 그것으로부터 온다.


나는 내 페르소나를 써 내려가며 책을 내고 강연을 한다.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업'을 재조명하지 못했더라면 얻지 못했을 그 깨달음들이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어 나의 앞길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계속해서 '선한 영향력을 나누는 생산자의 삶'을 만들어 가려는 이유다. 

그리고, 이 삶의 방향은 나의 '업'이 나에게 알려준 천상의 비밀이다.


'직업'에 한정된 삶을 살았더라면 절대 알지 못했을 것들.

회사의 크기에 내 인생을 맡겼더라면 얻지 못했을 통찰.


내 그릇의 크기가 내 삶의 질을 결정하고, 더불어 그것이 내가 속한 회사의 성과에도 도움이 되는 그러한 삶을 나는 지향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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