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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Nov 04. 2020

글쓰기는 생산자로 거듭나는 첫걸음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내 글의 가치를 자문하는 이유다.

유무상생(有無相生)


노자 사상을 줄이고 줄여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유무상생'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처럼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함께 살아간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유'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가 있기에 '있음'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무' 또한 '유'가 있음으로 '없음'이 성립이 된다. 다른 예로 빗대어 보면, 컵은 그 안에 빈 공간이 있어야 비로소 컵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돌이켜보면 나의 글쓰기는 바로 이러한 '유무상생'의 법칙에 따라 시작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무언가를 생산해보자고 시작한 글쓰기는 분명 너무나 소비적으로 살고 있다는 삶에 대한 회의와 환멸로부터였다. '유'와 '무'가 상충하거나 공존하며 존재하듯, '생산'과 '소비'의 관념이 머릿속에 맴돌다 결국 '글쓰기'로 실체화된 것이다.


소비하는 내 모습에 회의가 들던 그 순간.

이제는 무언가 생산해야겠다고 번쩍 정신이 든 그 순간.

그리하여 마침내 글을 쓰기로 다짐한 그 순간.


생산자로서의 첫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글쓰기는
생산자로 거듭나는 첫걸음이다!


나의 첫 글은 부끄러움의 표상이다.

글과는 전혀 관련 없던 삶과 글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경험이 만들어 낸 합작품. 어설프기 짝이 없고, 여물지 않은 단어와 문장이 얼기설기 엮여 있는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다.


그러나 나는 초라한 내 첫 '글'에, 첫 '생산물'이란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 뭔가 달라 보인다. 영글지 않은 부족함보다는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 내보였다는 용기가 보이는 것이다.


글은 '실재'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손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자음과 모음이 모여 무언가를 이루었고, 나는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는 그것을 읽을 수도 있고 어떤 느낌과 생각을 떠올리기도 한다. '글'이 생산물이라는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또 어디 있을까?


내어 놓은 글에 대한 부끄러움보다는, 그래도 무언가를 '생산'해냈다는 것에 가슴이 벅찼던 기억이다.

'월급쟁이'라는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존재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짜릿함. 그 벅차고 짜릿한 마음은 결국 나에게, '선하고 강한 영향력을 나누는 생산자의 삶'을 살자고 종용했다. 


쌓이고 쌓인 생산물은
내 자본이 된다.


'유무상생'의 관점으로 이 세상은 '선과 악'의 구도로만 이루어져있지 않다.

빛과 어둠은 공존하고 그래야 세상은 성립되어 돌아가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쁜 개념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쏠려 있을 뿐이다.


소비를 해봐야 생산을 할 수 있다.

생산을 하면 소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대개 '소비'에 쏠려 있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 사회, 소비가 미덕인 시대, 스트레스가 소비로 치환되는 세상. 그러나 문제는 무작정 소비에 쏠리면 그 안에 '나'는 없다. 나를 위해 소비를 시작했는데, '나'는 사라지고 화폐만이 오갈 뿐이다. 사면 살수록 공허해지고, 채우면 채울수록 허무해지는 아이러니.


그 회의감들이 응축되어 결국 생산자의 삶을 갈구하게 하는데, 이때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글쓰기'다.

따로 돈이 들지 않고, 바로 내가 시작하면 되니까 말이다. '글'이 '생산물'임을 믿고 받아들이면 나는 얼마든지 그것을 생산해낼 수 있다. 초기 몇몇 생산물들은 품질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어떤 함량이 미달될 수도 있겠으나 생산에 생산을 거듭하면 어느새 꽤 쓸모 있는 생산물이 된다.


그렇게 생산물이 쌓이면 그것은 나의 자본이 된다.

그리고 그 자본은 또 다른 생산을 위한 원동력이 된다.


글쓰기는 한쪽으로 쏠린 소비에 대한 회의감으로부터 온다는 게 참 흥미로우면서도 감사한 일이다.




생산자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으니 이제는 소비를 하더라도 생산을 위한 소비인가를 내게 묻는다.

소비를 위한 소비가 아니라, 결국 '나'를 위한 소비인가를 묻는 것이다.


책을 사거나, 영감을 얻기 위해 영화를 보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소비'의 미덕을 새롭게 느끼고 있다. 더불어, 다른 그 어떤 '생산물'들에게는 경의를 표한다. 그것이 물건이든 글이든 영화든. 누군가의 고뇌와 수고가 듬뿍 담겨 있음을 나는 이제 깨닫게 된 것이다.


생산자는 생산자의 수고를 알아채야 한다.

생산자는 소비를 하더라도 생산을 위한 소비를 해야 한다.

생산자는 소비자에게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


글쓰기를 할 때마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내 글의 쓸모를 자문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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