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함은 시간의 속성을 뛰어넘는다.
만 가지 발차기를 하는 사람보다,
한 가지 발차기를 만 번 연습한 사람이 더 두렵다
전설적인 쿵후 스타 이소룡의 말은 그야말로 내 가슴을 만 번 이상 흔들었다.
최근 TV에서 나영석 PD가 한 말도 가슴에 와 안착했다.
"예전엔 대단한 사람이 대단해 보였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오랫동안 꾸준한 사람이 정말 대단해 보이더라고요."
꾸준하다는 건 뭘까?
사전적 정의는 '쉬거나 중단함이 없이 한결같다'란 말이다.
그러나 실상, 쉬거나 중단이 없을 순 없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먹고, 자고, 쉬어야 하는 동물이다. 그러니 어느 한 가지를 식음을 전폐하고 계속해서 할 수 없다. 꾸준함에 대한 과도한 환상이다. 우리가 꾸준하지 못한 이유기도 하다.
다만, 우리는 한결같을 순 있다.
나는 오히려, '한결같다'란 말에 주목한다.
그동안 나는 '꾸준하다'란 말의 뜻을 잘못 알고 있던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어내거나, 꾸준히 해야 한다면 쉬지 않고 그것을 계속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말 그대로 식음을 전폐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러니, 나는 그 생각 앞에 항상 무너지고 넘어졌다. 좋아하는 일이든, 해야 하는 일이든 쉼이 있어야 한다. 중단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게 한결같지 않은 것이 아닌데, 잠시 쉬고 나면 나는 그것을 꾸준하지 못한 실패로 쉬이 결론 낸 것이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 꾸준함의 진실을 마주했다.
글쓰기를 결심한 후, 내가 생각해왔던 꾸준함인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글을 쓰는 것을 스스로에게 강요하지 말자고 다짐한 게 그 첫걸음이었다. 애초부터 목표 없이, 다그침 없이 글을 써보자고 다짐한 것이다.
뭐라도 하나하나 내어 놓은 글들은 불규칙적으로 보였지만, 이내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여러 권의 책이 출간되고 강연이나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를 만들어내는 꾸준함의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니까, 내가 무언가를 해 온 꾸준함을 우리는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불규칙적이라 할지라도, 볼품없어 보여도. 그 작은 것들에 점 하나하나를 찍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점들을 연결해본다. '점'들이 모여 '선'이 된다. 그 선이 바로 '한결같음'이다. 그리고 그 '선'이 모여 '면'이 된다. 좀 더 입체적인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동기와 기회가 된다.
번데기에게 세상은 2차원이다.
그러나, 점선면을 지나 날아오른 나비에게 세상은 3차원이다.
차원의 이동은 삶의 변혁이다.
이러한 변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나의 꾸준함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자꾸 완벽하게, 쉼 없이 무언가를 계속해야 하는 게 꾸준함이라는 생각은 내려놓아야 한다. 살아오면서 우리는 무언가에 분명 점을 찍어왔다. 이제는 선을 긋고, 면을 만들어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어떠한 점을 찍을지 고민해야 한다. 선으로 이어질, 그래서 만들어질 면을 고려하며 나아가야 한다. 차원을 달리 볼 수 있는 관점으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 단순히 시간을 2차원으로 쪼개고 만들고 나열하여 그 안에 갇혀서 될 일이 아니란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계획은 없다.
아니, 완벽한 계획은 절대 이루어지거나 실행되지 않는다. 시간 계획을 촘촘하게 세우고, 일정 관리를 아무리 잘해도 나의 꾸준함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면 남는 게 없다.
살아오면서 나에게 남은 건, 시간 관리를 하려다 남은 자괴감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자괴감들을 잠시 옆으로 치워보니, 나도 무언가 이룬 게 분명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 시간과 무언가를 이루어낸 것들을 한데 넣어 팔팔 끓이고 또 끓여보자.
결국 꾸준함만이 남는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꾸준함.
그리고 한결같음.
이것은 시간의 속성을 뛰어넘는다.
우리가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꾸준해야 하는 이유다. 시간의 연속성을 잠시 놓쳤더라도 재빨리 점을 찍고 선을 그어 면을 만들어내야 하는 이유다.
대단한 사람보다, 꾸준한 사람이 되어야지 오늘도 나는 다짐한다.
P.S
'점'을 찍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은 기록이다. 기록은 남는다. 남는 건 증거가 된다. 그 증거들을 그으면 선이 된다. 아무리 띄엄띄엄 글을 썼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