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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Dec 26. 2020

공기청정기를 청소하며

내가 청소한 건 공기청정기였을까, 내 마음이었을까?

예상대로 켜켜이 쌓여있었다.

먼지는 공기청정기 안과 밖을 휘감고 있었다.


묵묵하게 공기를 청소하고 물을 뿜어내던 녀석의 안은 썩어 있던 것이다.

주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더러워져야 하는 아이러니 또는 숙명.


그러고 보니, 집 안에서 먼지가 가장 많은 곳은 바로 공기청정기와 그 주변이었다.


주기적으로 필터를 청소하고 교체했지만 왠지 이번엔 그 이상의 것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켜켜이 쌓인 먼지가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묘한 느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굳어 있을 먼지와 때가, 마치 내 맘 속 온갖 근심과 걱정을 닮았단 동질감과 함께.


한 번도 손대지 않았던 곳까지 청소를 해볼까.

나사를 하나하나 풀고, 공기 청정기의 감추인 속내를 마주했다. 몰랐던 먼지와 때가 속속들이 보였다. 그것이 보이니 멈출 수가 없었다. 또 다른 나사를 또 풀고 공기 청정기 속으로 점점 더 들어갔다.


어떤 먼지는 굳어서 한 번에 닦이지 않았다.

또 어떤 먼지는 그저 한 번만 닦아주면 되는 그런 가벼움이었다.


장장 세 시간이 넘는 시간을 보낸 뒤 나는 허리를 부여잡고 잠시 쉬었다.


그러다 든 생각.


내가 분해한 건 과연 공기청정기였을까?

혹시, 내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수 시간을 들여서라도 청소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애써 괜찮은 척, 온갖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정화하느라 속은 썩어가고 있던 거구나.

연말이 되어 시간 여유가 생기니 그제야 돌아본 공기 청정기. 아니, 내 마음.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려면 내 마음속 먼지와 때는 또다시 쌓일 것이다.

얼마나 썩어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바쁘게 살다, 문득 나는 또 공기청정기를 청소할 것이고. 그 순간이 마음을 돌아봐야 할 적절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의 센서도 잘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갑자기, 올해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를 이제 막 끝냈다는 평온함과 안도감이 몰려왔다.

12월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날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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