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찌할 도리 없이 어찌 되었건 발생한다는 섭리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가만히 있어도 만날 사람은 만나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무기력함은 여기에서 온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내가 무얼 하든 무얼 하지 않든.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간다는 것에 우리는 압도당하고 만다. 말 그대로 '우연'과 '필연'의 향연에 우리는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 둘은 '인연'이란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인연'은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상황을 가리지 않는다. 언뜻 '인연'하면 사람과 관계된 무엇이라 생각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계산기나, 춥고 더운 계절들과 이별하고 있다. 새로운 물건이나 상황을 맞이하기도 하고, 오히려 내가 누군가를 떠나거나 어떠한 상황들을 박차고 나올 수 있다.
지난날의 '인연'을 돌아보면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다.
악연이라고 생각한 것이 도움이 된 경우도 있고, 좋은 인연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나중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 경우도 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만, 지난날을 돌이켜 나는 의미를 곱씹고 만다.
내 눈 앞엔 당장 꼴 보기 싫은 사람도 있고, 당장 벗어나고 싶은 상황이 있으며, 속히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인연과 이 순간을 영원히 유지하고픈 상황이 있으며 죽을 때까지 버리지 말아야지 하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장담하건대, 그 모든 결심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필연'과 '우연'의 향연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파티, 그들만의 축제. '인연'은 우리를 위한 선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무기력하게 모든 걸 감내하고 일방적으로 감당해야 하는가?
아니다.
답을 잘 모를 땐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그것들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여야할까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물어야 한다.
즉, 내 인생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
'인연'이 우연과 필연을 내포하고 있다면, '삶'은 '인연'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지랄 맞고도 일관적이지 않은 '인연'은 나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니, 우연과 필연의 향연에 놀아나지 말고, '삶'이라는 우리만의 시간을 능동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러할 때 '인연'은 우리의 '삶'안에서 작동하게 되고, 비로소 우리는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