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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Feb 22. 2016

박연이 하멜을 만났을 때

울었다. 옷깃이 젖을 정도로.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출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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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문헌을 바탕으로 박연의 입장에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내 이름은 박연.

1595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나는 1627년에 이곳 조선 땅을 밟았다. 원래 이름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 (jan jansz Weltevree)다. 네덜란드에 아내와 자식도 있는 내가 여기서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람의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단 하루 앞을 내다보기도 힘든.


나는 동인도회사 소속 홀란디아호에 승무하여 일본으로 가는 길에 갈아탄 아우버르케르크호에서 제주도에 표착했다. 동료 두 명과 함께 땔감과 음료수를 구하러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혔고 그렇게 조선에서의 삶은 시작되었다.


내가 알던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나라였다. 

그래서 관헌들이 횃불을 들고 우리를 잡으러 올 때 우리는, '이렇게 잡아 먹히는구나'하고  혼비백산했다. 나중에 알았으나 그들은 오히려 우리의 큰 체구에 놀랐고, 또 개처럼 다리 한쪽을 들고 오줌을 눈다거나 코가 커서 코를 머리 뒤로 돌려 물을 마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다. 서로에 대한 오해가 이토록 컸다.


나는 처음에는 본국으로  돌려보내달라는 요청을 간곡히 하였으나 점점 조선의 생활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서 정이 느껴졌다. 사람들에게서 호의가 느껴졌고 이방인을 절대 다시 외국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말에 일단 마음을 접은 것도 한 몫했다. 향수병이 없다고 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참을만했다.

여기에서 얻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딸이 큰 위로가 되었다.


난 훈련도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로 수도방위 사령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난 주로 홍이대포 기술을 개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동료 2명은 1636년 청과 벌어진 병자호란에서 안타깝게 사망했다. 이제 나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외로움이 나를 엄습했다. 그래도 나는 조선을 사랑하고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하멜과의 만남. 옷깃이 다 젖을 정도로 울었다!"


내가 제주에 난파한 외국인 선원을 심문하러 간 때는 1653년.

36명의 네덜란드 사람들이 좌초했다. 처음엔 네덜란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은근히 기대를 많이 했던건 사실이었다. 역시나 우리 나라 사람들이었다.


26년 만에 만난 고국 사람들이라 옷깃이 다 젖을 정도로 울었다.


문제는 내가 더치어를 많이 잊었다는 것이다. 번역하고 대화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내 모국어를 기억해냈다. 후에 그가 쓴 하멜 표류기에는 '훌륭한 통역자를 만나 우리의 불행한 처지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고마웠다.


당시 하멜은 23세였고, 내 나이 그때 58세였다.

하멜은 똑똑한 친구였다. 다른 선원들은 모두 문맹이었지만, 하멜은 서기로서 그 책무를 다했다.


나는 이 곳 조선에 사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하멜은 그렇지 않았다. 극심한 불안감과 향수병에 시달렸다. 하멜 외 35명의 다른 선원들도 각자 동요했다. 조선에 남아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서로의 뜻을 한데 모으는 게 쉽지 않았다. 일부는 바로 탈출을 감행하다 걸려 곤장을 맞기도 했다.


이러니 정부의 관리와 억압은 더욱 커졌다.


"한양에서 다시 만난 하멜"


하멜 일행은 제주에 남아 제주목사 이원진의 호의를 받으며 위로를 받고 지냈다.

하지만 그들의 고생은 이원진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며 시작되었다.


새로운 목사는 대우를 박하게 했고, 거기에 더하여 죄수 취급까지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양으로의 압송이 결정되고 효종임금을 만나 일본으로라도 일단 보내달라고 하나, 국법에 의해 그럴 수 없다고 명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효종임금은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나와 더불어 그들을 좀 더 활용할 생각을 한 것 같다.


하멜 일행 중에는 대포 기술자, 천문 이해자, 창틀 기술자, 조총 기술자 등의 다양한 인재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으리라.


결국, 그들은 내가 감독하는 훈련도감의 포수로 임명되었다.

그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검술과 춤을 보여달라며 연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한 사건으로 인한 이별"


효종 임금은 청나라를 매우 조심스러워하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를 원했다. 북벌을 준비 중인데 사전에 그러한 정보를 들키면 일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건이 생겼다.

1655년 청나라 사신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하멜 일행 중 수석 조타수와 몇몇 친구들이 사신의 길목을 막아서고 조선옷을 벗고 네덜란드 옷을 보여주었다. 말이 안 통하니 옷을 보여주며 본국으로 보내달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효종은 즉시 회의를 열고, 그 사신에게 갖가지 선물을 보내어 함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길목을 막았던 친구들은 소리 소문 없이 죽게 되었다. 좌절로 인한 자연사인지, 고문으로 인한 죽음인지 나도 알지 못한다.


만약 하멜 일행 중 누구라도 청나라로 호송되어 지금 진행 중인 홍이대포와 조총의 개발이 북벌을 위해서라는 것이 발설이 되면 그 결과는 뻔했다. 결국 하멜 일행을 한양에 남겨둘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사형'으로 매듭을 짓고자 했다. 이 회의를 주재한 인평대군에게 달려가 읍소 한 그들은 결국 유배형으로  마무리되었다.


1656년 3월. 그들은 전라도 강진 병영으로 유배되었고 나와는 그렇게 이별을 하게 되었다.


"전해 들은 소식들"


하멜은 그곳에서 7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그들을 감독한 전라병사에 따라 그 대우가 매우 달랐다고 하는데 일부는 큰 고생을 하고 또 일부는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그중 몇 명은 나와 같이 조선 여자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고도 한다.


조선을 강타한 기근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을 때. 하멜은 조선인 친구에게 큰 돈을 주고 배를 마련하여 1666년 9월 4일에 그를 포함 총 8명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렇게, 1653년 8월 16일부터 1666년 9월 14일까지 이어진 그의 조선 체류는 끝이 났다. 13년 하고도 28일 만이다. 일본을 거쳐 하멜은 1668년 7월 20일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고 한다. 암스테르담. 참 그리운 이름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하멜은 참으로 똑똑한 친구다. 그가 쓴 하멜 표류기 (1653년 바타비아 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는 13년 억류기간 동안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는 하나의 증빙이자 보고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꼬박꼬박 적은 이유가 있었다.


의도야 어찌 되었건 1668년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출판된 이 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글을 잘 써서가 아니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이 새롭고 신기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인도로 항해하기도 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나는 이역만리 조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최초의 서양인이고, 하멜 그는 유럽에 조선의 존재를 알린 최초의 사람이었다.


나와 하멜 이후에도 조선과 네덜란드의 연이 계속 닿았으면 한다.

이러한 우연이 몇 번이고 닿는다는 건, '인연'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 아는가.

우리가 홍이대포와 조총 기술을 주어 조선의 국방력을 강화하고 북벌 준비에 그래도 큰 도움을 주었듯이, 우리가 잘 하는 것을 전수하여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지. 예를 들어 먼 앞날 유행할 축구라든가 말이다.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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