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호 가수님 같은 분을 보면 기분이 참 좋아요. 어렸을 때 이런 이야기 많이 들었거든요. 연예인은 착실한 게 마치 손해인 것 같은, 17년간 성실도 끼가 될 수 있다는 걸 꼭 증명해 주고 싶었어요. 너무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제가 고맙습니다.
- JTBC <싱어게인 무명가수전> MC 이승기
분명 37호 가수의 무대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심사위원들은 속속들이 눈물을 보였다. MC도 무대의 화려함을 칭찬하기보다, '성실'이란 단어를 먼저 꺼냈다.
그 화려함을 만들어 내기 위한 자신과의 사투, 무명이란 타이틀로 견뎌내어 왔을 시간,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내려는 꾸준함과 성실함을 모두가 본 것이고, 그 앞에 모두는 숙연해진 것이다.
시간을 넘어서는 그 무엇
시간이 많다고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시간을 쪼갠 들, 그 쪼개어진 시간에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쪼개어진 시간만이 낭비될 뿐이다.
때론 시간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찾아내야 한다.
나는 그것이 '끼'와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선천적인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인 것인지를 묻는다면 나는 그 둘 다라고 말하고 싶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선천적인 것을 '과학적 재능'이라 하고, 후천적인 것을 '다중지능 이론'이라 구분하여 정의한다.
특히, 미국 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가 제시한 '다중지능 이론'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천적인 것은 이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다중지능 이론'은 선천적인 것조차 문화나 사회적 맥락에 따라 영향을 받거나 달라질 수 있다는, 말 그대로 다양한 변수를 감안한 이론이다. 즉, 후천적으로 얼마든지 또는 어느 정도는 그 어떤 '끼'와 '재능'을 만들고 계발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많은 걸 이루어낼 수 있다.
이전보다 더 많은 걸 이뤄낼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자신'과 '시간'을 이전보다 더 잘 관리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OOO는(은) 끼가 될 수 있다!
하여, 내 경험과 다른 사례들을 관찰하여 종합해보면 다음의 것들이 분명 시간을 넘어선 '끼'와 '재능'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첫째, 견디기(버티기)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란 희대의 명언이 있다.
이 한 문장이 모든 걸 말한다. 우리네 인생에서 꼭 필요한 말이다.
애리조나 사막에 사는 호피족 인디언들의 기우제도 이를 닮았다.
척박한 사막이 드넓은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남은 생존 방식. 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 그들은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은 비가 안 온다고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성이 더 부족하다 생각하고 더 큰 정성을 들였다.
'견디는 힘' 저서에서 나는, '견디기는 그저 버티고 서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견디기는 나의 내일을 생각하며 달리고, 넘어지고, 뛰어오르는 것. 즉, '견디기는 역동적인, 너무나 역동적인, 나의 의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37호 가수의 멋진 노래와 춤사위가 화려함보다는 눈물을 자아낸 이유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절망하기보단, 그저 넘어져 쓰러져 버티기보단, 오히려 정성을 더하여 만들어낸 역동적인 무대가 결국 '끼'가 된 것이다.
둘째, 성실함
'성실(誠實)'은 '정성스럽고 참됨'이란 뜻이다.
그 한자 뜻을 되내어보면, '정성'과 '열매'라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실'이란 말은 '열매'말고도 '이르다'란 뜻도 가지고 있다. 이 한 단어 자체에 정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열매가 맺어 어느 결과에 이르기 위해선 '정성'이 필요하다.
'정성'을 들인다는 건, 또한 '시간'이 수반되는 과정이다. 즉, '성실함'은 '시간'과 '정성'을 기반으로 하는 개념이다. '성실함'이란 말은 너무 많이 쓰여 흔하디 흔한 단어가 되었다. 누구나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몇몇 사건과 사례들이 성실히 사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도 실력이고, 성실한 노동의 이익은 자본의 이익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성실'이란 말이 너덜너덜해졌다. 쉽게 말하지만, 그 누구도 실천하려 들지 않는다. 저마다 더 빠른 길을 찾으려 고군분투한다.
그럼에도 나는 '성실함'이 시간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제는 '똑똑한 성실함'이 필요하다. 미련하게 열심히 하는 것이 성실을 뜻하진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처한 상황은 어떠한지, 환경을 탓하기보단 지금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묵히 말 그대로 성실히 해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왜'라는 질문과 '방향'이라는 좌표를 수시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것을 묻는 사람의 성실함은 언젠간 빛을 발할 것이라고 믿는다.
더불어, 누군가 이루어낸 것을 보고 시기와 질투로 그 사람들의 표면적인 조건을 따지기 보단 이제는 그 이면에 있는 '시간'과 '정성' 그리고 그들의 '성실함'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나에게 남는 장사이자 성실함의 원동력이다.
셋째, 꾸준함
꾸준함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꾸준하지 못한 내가 꾸준히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꾸준함을 이야기할 때 나는 '점', '선', '면'을 이야기한다. '꾸준함'은 '쉬거나 중단 없이 한결같다'란 듯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하다가 쉬거나 잠시 중단하면 쓰러지곤 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지난날의 내가 이루지 못했던 것들은 모두 그 탓이었다. 꾸준하기 위해선 쉬거나 중단이 없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띄엄띄엄 쓴 글을 하나의 '점'이라 생각하고 그 점들을 이어봤다.
매일 또는 정기적으로 쓰지 못했지만, 그것들을 이으니 '선'이 되었다. 흩어져있던 것들이 모여 마침내 한결같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즉, 나도 꾸준한 사람이구나를 알게 된 것이다.
이어진 '선'은 '면'이 되었다.
쌓이고 이어진 글들이 보다 입체적인 모양새를 만들어 내며, 그것은 내 스토리와 세계관이 되었다. 그리고는 책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되었다. 아직까지도 나는 꾸준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글을 쓴다. 써낸 글들을 점으로 찍고 선으로 연결하여 면을 만들어내면, 나는 꾸준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책이 나오고 강연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내 천부적인 글쓰기 재능이나 필력 때문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쓰고 모아 놓은 글이 모여, 말 그대로 내게 '끼'와 '재능'이 된 것이다.
나는 그저, '버티고', '성실하고', '꾸준하라'는 말이 귓등에도 들리지 않았던 적이 있다.
뻔하고 당연한 말들을 곱씹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던 것이다. 좀 더 빠른 길, 좀 더 강력한 한 방, 좀 더 쉬운 길을 찾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이 세 가지를 하루에도 몇 번씩 강조한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오히려 시간에 얽매이거나, 도살장 끌려가는 소와 같은 마음으로 임했던 것들을 돌아보니 과연 그곳엔 위 세 가지가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시간 관리를 위해선 그보다 나를 먼저 관리해야 한다.
나를 관리하기 위해선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림자를 앞서 가려는 어리석음과, '시간'과 '정성'을 간과하려는 우매함을 발견하여 걷어내야 한다.
그 과정을 견뎌내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성실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한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거 이루어낼 거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