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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12. 2021

아버지가 누구니

더 중요한 건 바로 '나'다. 나 자신이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란 대사가 전국을 휩쓴 적이 있다.

영화 '친구'의 한 장면 때문이다.


"그래 이누마. 느그 아버지는 죽은 사람 염하면서 돈을 버시는데 공부를 이 꼬라지로 하나?"

아버지가 장의사라고 말한 동수는 물리적 폭력 말고도 마음 폭력을 당한다.


"건달입니더..!"
"느그 아버지 건달이라 좋겠다! 이 새끼야!"
"누가 좋다 했습니꺼?"

건달 아버지를 둔 준석은 맞아도, 아니 구타를 당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내가 영화 속 동수나 준석이었다면, 나는 다행히(?)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버지 일찍 돌아가셨습니..."라고 말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앞뒤 잘라서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면 더 큰 매를 벌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가 없다고 말하는 나를 사람들은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이 참 익숙하다. 그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이어야 할 다음 말을 찾아 헤매었고, 대부분은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면 나는 그저 괜찮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곤 했다.


어렸을 땐 아버지의 부재가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라면으로 세 끼를 때워도 불쌍한 시대가 아니었고, 아버지가 있는 집도 함께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생이 되니 아버지가 있는 집과 나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그 이상이 되었다. 넥타이 매는 법을 친구에게 배우고, 대학 등록금에 절절매고, 다들 가는 어학연수를 가지 못하면서 차가운 현실을 깨우쳤다.


더 안타깝고 무서운 건, 나는 꿈이 없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경제관념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점이 너무도 아쉬웠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에게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언제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라는 말을 먼저 꺼내곤 했다.


심리학엔 'Self-handicapping'이란 이론이 있다.

안 좋은 결과를 대비해 미리 구실을 마련하는 행동이다. 시험 날 공부 많이 했냐는 질문에, 모든 친구들이 제대로 공부를 못했다거나 그냥 자버렸다고 대답하는 이유다.


배운 적도 없는 그 이론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착실히 실천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가 없다는 'Self-hanicapping'이 통하지 않는다.

내 나이 또래엔 이제 부모님이 떠나신 경우가 많고, 지금의 나는 얼마든지 과거의 내가 바꿀 수 있던 존재다. 더불어, 지금 이 세상은 결과로 판단되는 세상이다. 나보다 더 어려움에 처해있던 사람들도, 성공하고 승승장구한 경우가 많다.


즉, 나는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변명할 도리가 없다.


변명이라는 사슬에 내가 나를 묶었을지도


어쩌면 나는 스스로 한계를 지어 그 안에 가두어 놓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핑계를 삼아 익숙한 듯 주저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분명 그렇다. 나는 내 한계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여왔고 꿈을 크게 꾸지 못했다. 꿈을 크게 꾼다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럴 여유조차 없던 것이다.


가상의 돈도, 써본 사람이 쓸 줄 아는 것이다.


어느 날, 우리 아이들에게 커서 무얼 하고 싶냐고 물어봤다.

"저는 교수가 되고 싶어요. 근데, 그러려면 돈도 많이 들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뒤에 조건부처럼 달려온 말들이 내 가슴을 후려쳤다.


나는 그 날, 마음으로 울었다.

거대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의 큰 꿈을 이야기해야 할 아이들이다. 그러나 꿈을 이루는데 제약이 되는 것부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꿈꾸지 못하는 내 유전자가 그대로 전해졌단 죄책감에서였다. 대체, 나는 무얼 가르친 걸까? 내 꿈이 작다고, 아이들의 꿈까지 작아야 하나? 게다가, 아이들은 '아빠'란 존재가 있는데... 말이다.


KTX 안에서 방역 수칙을 어기고 햄버거를 먹던 한 젊은 여성이, 주위 사람들을 비하하며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나 알고 그러느냐"라고 말해 공분을 샀다.

대중은 대체 그녀의 아버지가 누군지를 궁금해했지만, 나는 그러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유명인이든 아니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에 겨워 보였을 뿐.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아이들은 같은 상황에서 나를 팔진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기분이 썩 좋진 않다. 크게 뭔가를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


다만, 나는 아이들의 꿈에 방해 되지 않기만을 바란다.

오히려 아이들이 꿈을 이야기할 때, 나는 잠시 잊히면 좋겠다. 아빠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아빠 '덕분에' 이득을 보지도 않길...!


부모 누구인지 중요한 시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바로 '나'다. 나 자신이다. KTX 안에서 아버지를 부르짖었던 그 여성분도, 저 스스로를 추슬러야 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임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을 것이다.


살다 보면, 때론 '동문서답'이 필요할 때가 있다.

다른 말로 '우문현답'이라 말해도 좋다. '아버지가 누구니'란 질문에, '내 삶은 내가 꾸려가는 것'라고  읊조리는 것이다.


부모 중 어느 한 누구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걸 우리 아이들이 떠올리면 좋겠다.


어쩌면 이 생각이 가장 필요한 건, 젊은 날의 나였는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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