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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13. 2021

소란한 마음을 잠재우는 좋은 방법

소란한 장단에 맞춰 분노의 춤을 추지 않도록.

소란한 마음은 시간을 와해시킨다.


'소란하다'란 말은 '시끄럽고 어수선하다'는 뜻이다.

시끄럽고 어수선할 때 우리는 그와 같이 요동한다. 집중하지 못하고, 소중하게 얻은 시간에 온전히 몰입할 수가 없다. 무언가를 이루어내기 위해선 이 소란한 마음을 어찌해야 한다. 잠재우던가, 아니면 맞서 싸워 이겨내거나. 가장 좋은 방법은 소란한 마음을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의 소란함은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란함은 외부에서 오는 것 같지만, 알게 모르게 그것은 내 안에서 오는 경우가 더 많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초라해 보일 때,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 앞날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 때 특히 더 그렇다. 


이러한 마음은 시간을 곧 와해시킨다.


와해된 시간은 무섭다.

그것만큼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게 없기 때문이다. 시간 계획을 아무리 치밀하게 세워도, 간만에 없던 시간을 확보해놨어도 어느 무엇하나 할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며 스스로에게 무릎을 꿇는다.


그렇다면, 소란한 마음에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잠재우던가, 싸우던가
아니면 함께 하던가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까지 소란한 마음과 무던히도 싸우며 살아왔다.

그것을 억누르려 하거나 애써 외면하거나, 아니면 맞서 소란을 떨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내 결론은 그 방법들 모두 그리 효과가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먼저, 소란한 마음을 외면하거나 억누르려 할 땐 분명 부작용이 동반되었다.

무언가를 억누르고 또 억누르다 보면 분명코 터지는 시점이 온다. 쓰레기봉투 값 좀 아껴보자고 알뜰 살뜰히 쓰레기를 욱여넣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분명코 그 봉투는 터지고 만다. 참고 참고 참다가 터지는 감정과 닮았다. 굳이 쓰레기봉투와 소란한 마음을 비교한 이유는, 억누르려 했던 대부분의 것들이 '감정 쓰레기'이기 때문이다. 쓰레기는 쓰레기 통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외면하거나 무조건 억누르려 할 때, 마치 그것은 악취 나는 쓰레기를 지금 당장 보이지 않기 위해 이불로 덮어 놓는 것과 같다.


이와 달리, 소란한 감정에 나 또한 소란하게 대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곧 '분노'가 된다. 즉, 덮여 있던 쓰레기가 폭발하는 시점이다. 내 마음에서 온갖 쓰레기가 폭발하여 여기저기 흩어진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물론 주위 사람들 또한 피해를 볼 수 있다. 즉, 소란한 마음에 소란함으로 대응하면 내 감정만 흔들리고 자칫하면 폭발할 뿐이다. 소란함에 소란함으로 대응하면 결단코 그것은 '후회'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소란한 마음과 상당히 긴 시간을 그렇게 아웅다웅해오던 나는, 결국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나는 덜 다치고, 이전보다 시간을 좀 더 잘 활용하여 더 많은 걸 이루어내는 방법. 애써 억누르려거나 맞서 싸우지 않아도 되는 방법.


바로, 소란한 마음과 함께 하기다.


손자병법의 '모공(謨攻)' 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상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다. 그러므로 최상은 병력으로 적의 싸우려는 의도 자체를 깨는 것이고, 다음은 적의 외교를 깨는 것이고, 그다음은 적의 병사를 깨는 것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최악이다.

- 손자병법, 모공 편 중 -

이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말도 나온다.


즉, 싸워야 할 상대와 나를 아는 것.

그리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이란 걸 조합해보면, 결국 '함께 하기'란 결론이 도출된다.


과연, 나는 내 소란한 마음과 싸울 때보다 함께 하고 나서 시간을 좀 더 잘 활용하게 되었고, 이전보다 더 많은 걸 이루어 내고 있다.

소란한 마음과 함께 한다는 건, 바로 나 자신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엔, 소란한 마음이 나를 괴롭히는 적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그것은 나를 걱정해주고 고민해주는 고마운 존재이자 시그널이란 걸 알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공격적인 언행을 저질러 내 마음이 소란해졌다면 그 감정의 요동을 남에게 전가하며 힘들어하기보단 그 소란함을 이해하고 그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또한, 누군가에게 질투를 느끼거나 자괴감이 드는 마음이 안으로부터 나오면 나는 그것에 매몰되지 아니하고, 나에게 그런 마음이 왜 들었는지 질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소란한 마음이 외부로부터든 또는 내부로부터든 그것이 왔음을 느끼면 그것을 피하지 말고 나를 중심에 놓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그 질문의 핵심은 바로, 그 상황에서 '나'를 지키기 위함임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소란한 마음을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


소란한 마음을 잠재우는 방법.

나를 지키고, 나를 객관화하며 나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래와 같다.


첫째, 글쓰기


뻔한 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면 마음이 소란할 때 정말로 글쓰기를 실천에 옮겼는지를 묻고 싶다.

아마도 소란한 상태에서 글을 써 본 적이 별로 없을 수 있다. 글쓰기는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한 상태에서 써야 한다는 정서가 가득하다. 그러나 나는 좀 달리 말한다. 오히려, 소란할 때 아니, 마음 안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글을 써야 한다고 믿는다.


글쓰기는 머리가 아닌 감정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로 풀어진 감정은 객관화가 된다.

더불어, 나는 그것을 인지할 수 있으며 소란함의 형태를 어렴풋이라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특히, 감성 충만하거나 가장 소란스러운 시간에 마음 그대로를 글로 풀어놓고 그다음 날 읽어보면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그 효과는 크다.


둘째, 걷기


19세기 전쟁으로 양산된 죄수들은 트레드 휠을 하루 8시간씩 굴려야 했다.

생산적인 노역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 외에 교화라는 의도도 담겨있었다. 즉, 생각을 단순화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부여한 것이다.


걷기를 해보면 스스로 교화되는 느낌을 얻는다.

과연, 19세기 형벌의 목적이 온몸으로 이해되는 순간이다. 이처럼 걷기는 소란한 마음을 잠재워주는데 특효약이다. 복잡하고 뿌옇던 머리는 맑아지고, 소란스럽던 마음은 이내 조용해진다. 걷다 마주하는 공기나 바람 그리고 풀벌레 소리는 나를 위한 협주곡과 같이 들린다.


바로 얼마 전까진 온 세상이 나에겐 적이었는데, 걷기를 하니 온 사방이 내 편이 된 것과 같은 느낌이다.

더불어, 글쓰기 소재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마구 생겨남과 동시에 건강도 챙길 수 있으니 걷기는 소란한 마음을 잠재우는 것을 넘어 축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셋째, 질문하기


"너 자신을 알라!"

예전엔 몰랐는데, 떠올릴수록 이 말은 묵직하고도 무섭게 다가오는 말이 되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곧,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인정하라!'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소란한 마음에 반응할 줄만 알았지, 그것의 원인이나 형태를 알아보고자 한 적이 없다.

또한, 소란한 마음은 바로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인데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질문하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내 안에서 발생한 그 마음과 감정을 나는 왜 모르고 있는 걸까?


나는 그것이 질문하지 않아서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소란한 장단에 맞춰 분노의 춤을 췄을 뿐. 왜 춤을 추고 있는지 몰랐던 것이다. 질문을 하니, 그제야 나는 나에게 왜 소란한 마음 장단에 놀아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남 탓하며, 세상 탓하며 나는 분노의 살풀이를 하고 있던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소란함은 언제든, 어디서든 온다.

그것이 왔을 때, 우리는 요동하고 흔들리며 애써 결심한 것들을 날리고 애써 확보한 시간을 허비한다.


마음의 소란함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깊이 바라볼 때.

그것을 무시하거나, 그 마음과 싸우려 하기보단 함께 하고 질문하며 소통할 때.


우리는 좀 더 우리가 원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결국, 소란한 마음은 우리를 괴롭히려 생겨난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란 걸 알아차려야 한다.


어떻게 그걸 확언하냐고 묻는다면.

결국, 내 소란한 마음 덕분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노라고 온 체중을 실어 대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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