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글쓰기로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나는 '한 줄이라도 써보세요', '제목이라도 써보세요'라고 조언을 준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글럼프를 만나면 나도 어찌할 재간이 없다.
물론, 글럼프의 종류나 성격이 좀 달라지긴 했다.
예전엔 시작하지 못하는 머뭇거림이었다면, 이젠 위에서 말한 세 번째 의미에 가깝다. 글쓰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루틴을 만들고 제목으로 쌓아 놓은 엄청난 양의 주제가 있으나, 나는 내가 원하는 표현의 수준을 끄집어낼 수 있을지에 의심이 드는 것이다. 완벽할 수 없으면서 완벽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의 질병이 또다시 도지려는 찰나다.
글럼프는 어디서, 왜 오는가?
글럼프는 어디에서 올까?
그것은 아주 확실하다. 내 마음에서다. 내 마음의 얕거나 깊은 의식 속에서 글럼프는 고개를 쳐든다. 순순히 글이 써질 줄 알았냐는 비아냥과, 그동안 써온 글은 어느 열정의 불타오름과 함께한 찰나가 아니었는지를 추궁한다.
그렇다면 글럼프는 왜 올까?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안 써지는 이유에 대한 오만가지 원인을 찾아 헤매다, 나는 뒤통수를 후려쳐 맞은듯한 깨달음을 얻어 그 확실한 이유를 게워낸다.
글럼프가 온 이유.
나는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글럼프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증거다. 이것은 빼도 박도 못할 증거다.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이보다 더 확실한 근거가 또 있을까?
글럼프가 오거나, 글태기가 왔을 때 나는 나를 책망했다.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그저 나를 탓하면 되었다. 안 써지는 분노와 울분을 나에게 쏟아내면 되었다. 그러나 남는 건 없었다. 아니, 상처만 남았다. 나는 글을 쓸 자격이 없다거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글을 써서 뭐하냐는 자괴감이 심장을 후벼 팠다. 결국, 글쓰기는 오히려 더 긴 시간 동안 멈추게 되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내가 생각을 바꾼 이유. 부정적이고 자책감 가득한 화살을 나에게 쏘는 대신, 저 멀리 어느 곳의 목표를 향해 활시위를 다시 겨누는 것. 스스로를 괴롭히던 나와, 그래도 계속해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내가 마주 보며 으르렁하는 게 아니라 다른 하나의 공동 목표를 보게 되는 순간. 아웅다웅하던 두 존재가 악수하며, 잠시 조금은 쉬어가도 된다는 덕담을 나누며 이내 화해하게 된다.
나를 괴롭히는 글쓰기는 그만 둘 때도 되었다.
글쓰기는 나에게 있어 그 어떤 과업이 아니다.
나는 글로 숨을 쉰다. 어느새부턴가 그리 되었다. 힘들면 쓰고, 넘어지면 쓴다. 기뻐도 쓰고, 신나도 쓴다. 글쓰기는 그렇게 일상이 되었고, 삶이 된 것이다.
억지로 해야 할 때, 나를 돌보지 않고 무언가를 해야 할 때 나는 괴롭다.
글쓰기가 괴롭다는 건, 글쓰기를 의무 또는 극기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다.
꾸준한 글쓰기란 명분으로 자신을 책망하며 하루에 한 편 이상의 글을 써내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보다 '꾸준함'이 더 중요할까? 적어도 글쓰기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꾸준함'보다 '나'를 더 추구하고 싶다.
글을 쓰는 건 나다.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위해서다.
그러니까, 글럼프가 왔을 땐 '내가 글을 쓰고 있구나'를 느끼며 잠시 쉬어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이 말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하는 말이다. 물론, 글을 쓰는 모든 '나'에게도 전하는 말이다.
나를 괴롭히는 글쓰기는 그만둘 때도 되었다.
글럼프는 나를 괴롭히러 온 게 아니다. 오히려, 글럼프가 오지 않으면 내가 정말 글을 쓰고 있는 건지를 돌아보는 마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