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마음 읽기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자극과 반응 사이 살피기

by 스테르담

가족들을 태우고 운전을 할 때였다.

녹색 등이 켜진 후 앞으로 가려는 찰나, 한 SUV가 급하게 왼쪽 골목으로부터 튀어나와 1차선을 가로질러 내 앞으로 끼어들었다. 순간 놀란 나는 경적을 길게 울렸다. 그러자 그 차는 적반하장으로 내 앞길을 막고 한동안 가지 않았다. 순간, 심장이 쿵쾅대고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려서 따질까?

경적을 더 울릴까?


가족들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려서 따진 들, 경적을 더 길게 울린 들 바뀔 건 없을 터였다. 그 상황이 바뀔 거였다면 그 운전자는 몽니를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대개 몽니를 부린 사람들은 잘못을 인정하긴 커녕 더 비뚤어지기 마련이다.


사실,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이러한 태도를 보인 건 두 가지 덕분이다.

예전이었다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시비에 휘말리는 치킨 게임을 했을 것이다.


자극과 반응 사이,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두 가지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게 한 번 더 생각하게 해주는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역시나 가족이다.

나 하나라면 어떠한 시비에 휘말려도 괜찮지만, 가족이 있으니 그러하면 안 된다는 마음과 결단이 앞선다.


두 번째는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를 통해 변하고 나아진 게 너무나도 많다. 시비의 시작점에서 마음이 쿵쾅거릴 때, 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지금 이 상황을 글로 옮긴다면, 나중에 이 마음의 모양과 요동을 표현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과 함께 순식간에 마음으로 글을 써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의 시비를 걸어 남는 게 없다는 결론이 순식간에 도출되었다.


나는 지금, 그때 순식간에 써 내려간 마음을 다시 차분히 이렇게 글로 써 내려가고 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사람의 상황이 십분 이해된다. 잘잘못을 떠나 뒤에서 누군가 길게 경적을 울리면 기분 나쁠 수 있다. 그러니 비상등을 켜거나 사과의 표현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또는 옆 자리에 앉은 아내와 말다툼 중이었을 수도 있고.


내가 화난 건, 사고가 날 듯 앞길을 막은 끼어듬도 있지만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적반하장의 태도에도 있었다.

어쩌면, 후자 쪽이 더 컸을 것이다. 앞차가 미안함의 표시로 비상등을 켰다면 순간 가라앉을 마음이었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비상등의 유무가 뭐 그리 중요한가 싶다.


결론은 나와 앞 차 운전자 둘 다 맞다.

그 상황에 맞는 감정을 느낀 것이고, 표현한 것이다.


물론, 틀렸다면 둘 다 틀린 것이고.


마음을 쓰고, 마음을 읽고


글쓰기의 매력은 '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감정을 형상화할 순 없지만 그것은 기어이 '글'로 '실체'가 된다. 마음과 감정을 다 담아낼 순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 단어와 문장이 그 이상을 표현해낼 때도 있다.


보이지 않으면 사람은 잘 믿지 않는다.

아니,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게 더 맞겠다. 인식하지 못한다는 건, 보이지 않는 것에 이리저리 휘둘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도 왜 그랬는지 모르는 이유는, 내가 내 마음을 바라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보려면, 생각을 인식하려면 글로 그것들을 실체화시켜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고, 읽을 수 있다.


볼 수 있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나는 왜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내 마음과 생각을 끄집어내는 걸 하지 않았나 자책이 담긴 자문을 한다. 하루라도 더 빨리 내 마음을 봤더라면, 내 생각을 인식했더라면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란 푸념이 가득하다.


이러한 푸념 또한 글쓰기를 통해 알게 된 후회다.

더불어 이러한 푸념은 지금에라도 글을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로 바뀐다. 물론, 이 또한 글쓰기를 통해서다.




살아가다 보면 화들짝 할 때가 있다.

기쁨이, 분노가, 노여움이, 흥분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단언컨대, 나는 글쓰기 전과 후에 그러한 감정의 요동에 덜 휘둘리고, 오히려 그것들을 더 진하게 만끽하며 살고 있다. 기쁘거나 흥분될 땐 기분에만 그것을 맡기지 않고 '나'를 깨우쳐 그것들을 누린다. 분노와 노여움을 마주했을 땐 그저 충동에 그것들을 내어 주지 않고 '나'를 써 내려가며 자극과 반응 사이를 살핀다.


그러함으로 나는 평정심을 예전보다는 조금 더 잘 찾게 되었다.

평정심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잘 흔들리는 것이다. 흔들리다 나가떨어지는 게 아니라,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렇게 글쓰기는 마음의 중심이 된다.

마음을 쓰고, 마음을 읽으면 그리할 수 있다.


쓰고 읽는 마음은 언제나 내 마음의 중심에서 시작하여, 내 마음의 중심에서 끝을 맺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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